Day off

골 때리는 시간

by 이븐도





닌자 블레이드, 프링글스 오리지널, 까진 입술, 택시, 꽃가루, 5월 중순. 골 때리는 것들이다.






백화점에 갔더니 닌자 블레이드라는 게 있었다. 믹서기인지 아이스크림 메이커인지 아무튼 그런 거였다. 블레이드가 아니고 블렌드구나. 어차피 블렌드 안에 든 게 블레이드 아냐? 그러니까 그게 그거인 걸로 한다. 닌자 블레이드 같은 하루였다. 그 손에 착 붙게끔 적당히 작아 보이는 믹서기. 갈갈갈갈 안에서 잔뜩 요동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해지고 또 갈갈갈갈갈.


오늘의 닌자 블레이드는 끝났다. 고요해진 나는 까진 입술 가장자리를 계속해서 핥다가 저녁 감기약을 안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4일치 먹어보고 달라지는 게 없으면 독감이니까 다시 오랬는데. 이제는 멀쩡하다. 현대의학 만만세.


모레 나는 또 닌자 블레이드 속의 토마토 오렌지 사과 케일 무슨 베리 등등이 되겠지. 우는 애들이 골때렸고 그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골때렸다. 나는 애들 우는 소리에는 일가견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떤 반박도 받을 수 없다. 그 우는 소리들은 진짜다. 진짜로 잘 갈릴 블라스트 포터블 닌자 블렌더처럼. 아니면 푸디 파워 울트라.. 하여간 있어 보이는 말들은 다 갖다 붙인 그 기계처럼.




나는 그 소리들의 한가운데서 가끔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지금은 내 방이다. 그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지만 그걸 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남았다. 골때리지? 그럼 관두던가. 진짜, 관둘까. 때려쳐? 정말 타부서로 보내 달라고 할까?


지긋지긋하게도 우는 애들, 또 우는 애들, 또 우는 애들. 난 그걸 듣는 대가로 돈을 받지 않는데. 나는 처방을 수행하고서 돈을 받는 건데. 많이 양보해 주치의 재촉도 하고 각종 민원 응대도 하고 토사물도 갈아서 치워 주고 하지만 우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는 건 해당사항에 없는데. 그러니까 울음수당 같은 걸 좀 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루이틀도 아닌데 요샌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나 여기서 삼 년 있었는데. 더더더 힘든 것 같다. 아닌가. 그래.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거다. 작년 어드메쯤이나 올 초 태어난 애들의 울음소리가 특히 더 시끄러운 뭐 그런 기현상은.. 없겠지.




진짜 로테이션 가야 하나? 사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원망스럽고 내가 울고 싶다. 난 니네만할 때 그렇게까지 안 울었단 말이야. 제발. 이모 힘들다. 아냐. 난 안 울어. 나까지 울면 더 시끄러워. 그건 안 돼.






친구와 영화를 봤다. 그녀는 오프였고 나는 이브닝이었다. 영화는 열두 시 사십 분에 끝났고 나는 한 시 반에는 지하철역에 서 있어야 했다. 빨리 나올 것 같아서 햄버거나 브런치를 먹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영화 시작부터 햄버거를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 장면이 나왔다. 그걸 봤다고 햄버거가 땡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친구가 햄버거를 먹자고 했다.






매장에 들어갔더니 그 시뻘건 인테리어를 프레임으로 파란색의 평화로운 아쿠아리움이 들어차 있어서 골때렸다. 하나하나 골라야 할 게 열받을 만큼 많은 와중에 키오스크는 없고 빨간 티셔츠와 모자를 쓴 직원에게 고래고래 소리쳐 말해야 해서 골때렸다.

직원은 오후 한 시인데도 엄청나게 지친 표정으로 우리보다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주문을 확인했다. 목도 정신도 다 나갈 것처럼. 바꿀 건 좀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게 대체 뭔 감성이람, 얼탱이 없는 미국 놈들.


우리는 그 아쿠아리움 속을 떠다니는 물고기들을 보며 종이봉투를 찢고 그간의 밀린 근황과 영화에 대한 감상을 한두 줄씩 중구난방으로 뱉었다. 메뉴를 받아오느라, 휴지를 더 가져오느라, 내가 쏟은 식초를 닦느라, 쏟은 식초를 다시 가져오느라 대화는 다 뚝뚝 끊겼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매장에서는 빨리 먹고 빨리 꺼지라는 듯한 락음악들이 잔뜩 나오고 있었으니까. 끊겨서는 안 될 이야기를 그런 데서 꺼내는 건 토픽에 대한 모독다.




나는 영화에서 연우진을 봤는데 그 친구는 김무열을 봤다. 윤승아와 사귀던 시절 둘의 연애를 발각시킨 트위터 내용을 보여주며 좋아했다. 나는 그게 왜 좋은 건지를 설명하는 그 모습이 더 흥미로웠다.


근래 이브닝들이 다 빡세서 그 자극적인 영화를 보고 역치를 올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안 바빴다.

나는 병원으로, 그녀는 기숙사로 가기 위해 함께 오른 전철이, 그간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면서 신호대기가 끊겨 어쩌고의 사유로 약 십오 분을 정차해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택시를 타야 했다. 극심히 골때렸다. 열이 받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와 오늘 다 택시를 탔군. 사치스러운 삶이로다.






그녀는 수족관의 돌리를 보면서 저게 나겠지, 했다. 그리고 멀찍이 고개를 뺀 후 수족관을 보고 덧붙였다. 저건 병동.

나는 반박했다. 쟤들 봐, 얼마나 평화로워. 상어도 물고기도 또 물고기도 왕큰물고기도 서로 피해 안 주고 슥슥 지나가면서 공존한다고. 저게 어떻게 병동이냐? 리고 너 쟤 아냐.

그녀는 수긍했다. 맞는 말이니까. 그녀는 그 아쿠아리움 안의 상어 밥으로 던져줘야 할 것 같은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그녀들의 명대사에 대해서. '내가 너를 타겟으로 삼지 않게 해 줘, 제발'.






뭐라고? 지가 킬러야? 그런가보지. 킬러는 씨, 저기 던져 놓으면 아무 말도 못 할 거면서. 저길 왜 던져? 상어 있잖아. 저게 상어야? 상어지, 그럼. 넌 그럼 저게 뭔 줄 알았어? 아, 난 처음 봤어. 아니, 그럼 여태 뭐 보고 있었니. 나, 너? 차암나.

친구는 본인을 그런 저열한 생각을 하게 만든 그들이 너무 싫다고 했다. 뭔 생각 했는데? 청부업체에 의뢰나 해버리고 싶다고. 아. 그 선임들. 아까 그 영화.



근데 그게 저열해? 저열하긴 한가. 뒤에서 통수 쌔리고 내 손에 피는 안 묻힌다는 거니까. 음, 아냐.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 자체가 나한텐 스스로 충격이야. 야, 그 정도가 무슨. 그리고 그게 왜 저열해. 그냥 생각인데. 실제로 한 거 아니잖아. 타겟은, 씨.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네. 꼴같잖은 것들. 대체 입사시험은 왜 치는 걸까. 온갖 지랄같은 면접은 왜 보는 걸까. 이렇게 못 걸러내는데.

나는 그 어떤 사회적으로 빛나는 타이틀도 쥔 적이 없었지만, 어떤 문턱을 넘었다는 것만으로 누군가가 신으로 취급받는 것은 정말 기형적인 현상이라는 데에 어느 순간 동의했다. 그간은 발언권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제는 너무 많은 사례를 말할 수 있다. 자격은 여전히 없지만 아무튼 증거는 느꼈다구. 여기 봐. 직종 막론하고 등신들 천지잖아.




타겟으로 삼으면 어쩐대?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야. 알아내야지, 라고는 말 안 했다. 호사 사십 명이라고? 너네 병동? 아니 그럼 학교 다닐 때 한 반 애들보다 많은 거 아니냐? 이름도 못 외우겠다. 그냥 선생님 하고 눈웃음쳐. 사십 명이라. 아이고. 끔찍해.


간호사 안 했으면 뭐 하고 있었을 거 같아, 넌? 취준생이겠지? 아. 짜증나게 하지 말고. 그럼 뭐, 뭐 말하라고. 중소기업 사무직? 니가 뭔 중소기업이야. 몰라. 진짜 취준생이었겠지. 에휴, 내가 이걸 대낮에 물은 게 잘못이.

나는 간호학과에 적을 두고 생물과 생리학을 지지리도 못했던 주제에 누가 그런 걸 물으면 '해양생물학자'라고 대답한 적이 꽤 많았다. 골때리게. 왜 그러고 다녔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임상 나가면 뭐 할지 모르겠으니까 의료통역사, 건보공단, 산업보건관리직. 근데 그거는 뭐가 어쩌고..

친구는 줄줄 말했다. 기집애. 들어온 지 일 년밖에 안 됐으면서, 나보다 선배였다. 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그 외 많은 것들에서도? 왜 나만 이 모양이지, 라고는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햄버거는 역시 멀리 있을 때만 아름답다. 아니면 싸구려일 때나. 온갖 비싼 수제버거며 해외 브랜드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난 그냥 롯데리아 새우버거나 맘스터치 싸이버거가 수준에 맞았다. 사실은 맘스터치 버거도 가끔씩 내게는 수준이 높았다. 크기가 커서 입에 소스가 묻고 안에 있던 피클이며 양파가 다 떨어져 나왔다. 열받게. 햄버거를 먹는 것보다 입가를 닦고 자리를 치우는 데 드는 수고가 더 컸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상어 한 번 보고, 질기고 두꺼운 소시지가 다 튀어나온 핫도그 빵을 한 입 먹고, 친구 얘기에 대답했다가, 은박지 밑으로 새어나오는 걸 손으로 집어 먹고, 또 입을 닦는다. 골때리게 주문한 음식을 골때리게 먹었다.






아홉 시 반에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아무도 안 읽을 글을 혼자 열심히 쓰다가 한 시에 병원으로 출발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자니 까만 화면에 누런 꽃가루가 점점이 박히기 시작했다. 아, 집 창문 열고 왔는데.

다섯 시에 남은 프로틴쿠키 쪼가리를 먹고 열한 시에 나를 불쌍하게 본 듯한, 내일의 퇴원이 궁금한 보호자가 적선한 닥터유 에너지바를 먹었다. 그걸 내밀면서 뭔가를 물었고 나는 그 에너지바만큼이나 성의껏 대답했다. 차가 끊겨 택시를 탔다.




눈에 바늘을 꽂고 피 검체통을 가슴에 떨렁 붙인 남자애가 물을 달라고 땡깡을 부렸다. 수술 드레싱을 잡아뜯으려 해서 억제대 처방을 받으려 했었다. 오늘 안과 당직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당직은 따로 없고 교수님께 노티를 하면 된댔다. 그럼 그 당직이 교수라는 거 아닌가? 인트라넷에 들어가 당직표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는 새에 남자애는 땡깡을 멈췄다. 할머니는 소극적이었다.


얘가 성질이 억씨서.. 그것도 맞았겠지만 일단 수술했고, 밤 열두 시부터 지금 저녁 여덟 시까지 물 한 번 못 마셨다. 이것만으로도 어떤 난동을 피워도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이해는 했다. 그리고 그 애는 이해의 범위를 넘을 만큼 시끄러웠다. 그래도 좀 큰 애라 한 살 좀 넘은 애들이 내는 줄기찬 울음소리는 못 따라갔다. 블레이드, 닌자 블레이드 같은 날이다.

4월에 뭘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고 이번에도 그렇다. 정말 눈 좀 감았다 떴더니 5월이다. 그것도 중순.






택시에 늘어져서 노엘 갤러거의 트로트 같은 노래를 들었다. 그냥 그대로 거기 짐짝처럼 내팽개쳐진 채 자 버리고 싶었다. 이대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면 택시비가 얼마가 나올까, 같은 아마 스펀지 같은 데서 했을 실험 비슷한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퇴근했다. 열 시에 나가 한 시 반. 거진 열세 시간의 꽃가루가 내려앉았을 집으로. 골때렸다.


아니지, 정말 골때리는 건 이거지. 이런데도 그만두지 않고 있다는 것. 대체 이런 걸 어떻게 7년, 8년 하는 거지. 나이트번들이 무슨 사번 이야기를 하다가 내 사번 근처의 번호를 말하더니 머야 엊그제 들어왔네, 했다.

나는 그 엊그제 근처에 겨우 간 거군. 엊그제라니. 이 환장하게 많은 닌자 블레이드의 날들이 겨우 엊그제라니. 끔찍하다. 정말로. 더 끔찍한 건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는 거다. 그런데 정말로, 로테이션을 가긴 가야 할까.




애들 우는 건 경력에 포함이 안 된다. 들인 노력에, 수고에 비해 댓가가 너무 짜다. 그런데 하나 더 열받는 게 있다. 그 언어장애가 있던 눈 수술 남자애가 내 말을 잘 들었을 때다. 내가 무서웠나. 봐, 안 아프지. 했을 때 진짜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게 뭐 어쨌냐고? 당연히 나는 그래서.. 이 일을 못 그만둔다 그런 얘기는 아니고. 그건 좋았다는 것이지.






입술이 아프고 프링글스를 먹은 입이 짜서 골 때리는 밤이다. 오늘은 말 그대로 그만큼 먹고서 쌔빠지게 일했으니까 스스로가 한심하진 않다. 이건 칼로리 보충이잖아. 정말.



내일은 내가 오프다. 아, 새벽 두 시니까 오늘이 오프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고단한 하루다. 언제 이렇게 반 년이 가버린 건지 믿을 수가 없다. 골때리는 일이다. 정말.

프링글스 위에 마지막 감기약이나 얹어 줘야겠다.

하루짜리 오프. 블레이드를 뺀 닌자 블렌더 안에 있는 것처럼 고요히 앉아 있고 싶기도 하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뭘 해 하긴, 내가 맨날 뻔하지.



졸리다. 자기 싫다. 골때린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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