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구독하는 신문은 딱 둘인 줄 알았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중학생쯤 되어서야 깨달았다. 모두 우리 집처럼 저 두 신문만 읽지는 않는다는 것을.
16년도에 난리가 났을 때 나는 수험생이었다. 수능 후 근황을 교환한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방의 양초 두 자루를 꺼내며 '응, 아빠가 잘 다녀오라고 주던데?'라고 했다. 놀랐다. 아, 저럴 수도 있구나. 나한테는 왜 가보라고 안 해,라는 말에 아빠는 '더 커서 니가 혼자 생각해 보고 가'라고 했다. 참 개인적인 기억들이다. 그리고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조금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것일 수 있다고.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것이 정치 같아서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다.이걸 고백이라고 해야 하나?이쪽의 이것이 맞는가 싶으면 저 부분이 걸렸고, 저쪽의 저것이 틀렸다 싶으면 이건 또 맞았다.코트가 아닌 패딩을 입고, 장갑을 챙기고, 데이근무가 끝난 후 집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면서도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솔직히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정확히 몇 번 출구로 가야 하는지도 찾아보지 않았다. 그냥 같은 노래를 끊임없이 들으면서 그 방향으로 지하철을 갈아타고 걸었다.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을 때 아빠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다. 만화에서 표현된 어떤 에피소드에 대해서 말하면 아빠는 그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해줬다. 재밌지 않냐?라고 하면서. 엄마와 싸운 후 구겨 던진 성적표를 방 책상에 펴놓은 후 잘했다고 말해 준 적도 있었다. '씨게 온' 사춘기가 아직도 막을 내리지 않았던 때, 혹은 그냥 잔뜩 뒤틀린 심보와 그 성질머리를 주체하지 못했던 밤에는 30분 넘게 차를 타고 가서 심야영화로 '마션'을 같이 보고 온 적도 있었다.
아빠가 절대선, 엄마는 절대악이었던 뭐 그런 것은 아니다. 기숙사에 살던 때 아빠가 '고구마를 보내 주겠다'라고 한 적이 있다. 테팔 무선주전자 박스에 정말 고구마만 몇 개 들어 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엄마는 겨울옷을 부치겠다고 해놓고는 늘 엄청나게 커다란 박스에 온갖 과자와 과일과 일용품을 함께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 집 천장 아래서 발생한 잡음들은 주로 내가 엄마와 빚었던 갈등들에서 비롯한 거였지만, 의외로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 아빠는 완고히 반대한 경우도 많았다. 여하간 그랬다. 아빠는 무슨 슈퍼맨이나 미국 가족영화에 나오는 그런 이상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아빠에게 대뜸 전화하거나 문자하는 식으로 조언 비슷한 것을 요구했다.
'진짜 시위'는 그전날 한 차례 지나간 모양이었다. 날은 추웠고 사람이 그래도 많았고 이어폰을 빼자 말도 안 되게 흥겨운 노래들이 직설적인 단어들을 잔뜩 담고서 나오고 있었다. 백팩을 메고 장갑을 낀 채 저 멀리의 국회의사당을 보고 서 있자, 의외로 별 거 아닌 일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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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소식을 접한 것과 비슷했다. 살면서 어떤 정치적인 시위나 집회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를 떠올릴 때 전자를 선택하게 된 건 '아무튼 안 가면 엄청 후회할 것 같다'의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콘서트 일정이 뜨고, 오프를 내고, 티켓팅을 하고, 그 공연장에 실제로 가기까지의 마음가짐은 '나는 당신들을 미친 듯이 사랑해'보다는 '내가 그렇게까지 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안 가면 후회할 것 같다'인 적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빛나는 것들과 피켓과 깃발과 슬로건을 들고 앉아 있거나 서 있었고 노래가 크게 나왔고 조금, 사실 많이 신나기도 했다. 자꾸 앞으로 가게 되는 것까지도 비슷했다. 명확히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 출석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뜻을 표방한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거였다.
계엄령이 발표된 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도 황망한 목소리였다. 나가야 되니까 빨리 끊어라,라고 했다. 여태 이런저런 핑계 속에 지내면서 이런 종류의 사안은 남의 일인 양 지냈지만, 그날은 그게 안 됐다. 어떻게 있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빠는 지금 내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입장도 아닌 모양이었다.
일을 하고 있었더니 '추우니까 보일러 잘 틀고 옷 꼭꼭 입고 집회나 나들이 나가지 말고 SNS 하지 말아라'는 카톡이 왔었다. 그땐 내가 이런 곳에 올 줄 몰랐다. 와보니 별 일도 아니긴 했지만 이행사가 단지 '별 일도 아니다'는 식으로 서술될 수 있었던 것 또한 많은 것들이 잘 맞물려 돌아가서였다.
IF,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선동도, '좌빨'도, '2찍'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안전과 행복이 위협받는 게 싫었다. 화가 났던 것은 그것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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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건 해가 떨어진 후 그 커다란 공원으로 몇 번을 나가고도 여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내가 받는 월급의 적지 않은 만큼을 이 동네의 월세를 감당하는 데 쓰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상 쓸데없는 인형 키링이나 사모으고, 오늘은 무슨 색 신발을 신을까 정도의 고민을 하고 화면 속 아이돌을 보며 '언제 컴백해요'같은 생각을 하면서 일상을 살 수 있는 건 다 이곳이 어느 정도로는 상식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많은 것에 대해 푸념했고 짜증을 냈지만 그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았다. 분노했던 지점이 거기 있었다.
내가 누리던 행복이나 즐거움은 그날 밤의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구현되는 곳에서는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 주체가 타국의 누군가도 아니라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못 받아들이면 어쩔 텐가. 이 서술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없는데. 기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슬펐다. 그리고, 퇴근하고 그 먼 곳까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가야 하는 건 다 내가 무관심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나머지 공부' 같은 거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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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그간 내게 했던 조언들은 사실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빠였기에 그것이 내게 닿는 무게가 달랐을 것이다. 아빠는 이 사안에서 부재중이었다. 아빠는 특정 직군에 종사 중인 직업인이면서, 앞으로도 다른 무엇보다도 나의 안위를 가장 걱정할 한 사람이었다.이 쉽지 않은 이해관계들을 단지 서운하게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은 울적했으나 그래도 아빠니까.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잘 살아야 하니까.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닫으려 한다. 정치는 특히 그렇다. 아무튼 진보와 보수, 같은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는 항상 그런 입장을 취하려 했다. 자라온 환경을 감안했고 누려오거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을 배제하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의견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너무 많은 전제를 깔다 보니 특정 스탠스에 서는 건 또다시 미뤄지곤 했다. 그런 채로 몇 번의 투표와 사건들을 지나며 나이를 먹었다.
그 방향의 누군가가 좋고 싫고를 떠나 내가 누리고 있는 건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내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인 것도 알았다. 나는 다분히 개인적인 사유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도 서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편이고 싶었다.
그날 밤 균열이 갔던 것은, 숨 쉴 때 공기를 인식하지 않는 것 같은 종류의 평안함이었다. 어떤 것에 대해서는 나는 이제 그 무엇에도 기댈 수 없는 어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성인이기 이전에 여전히 '어디 내놔도 불안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자식이겠지만, 어느 방면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느꼈다. 별로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알게 되었다.
금이 간 표면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을 어디로 어떻게 던져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다시 원위치로 끼워 맞춘 채 몰랐던 척 살기에는 충격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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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 그것을 위해 돈을 벌고, 그 돈벌이를 문제없이 하기 위해 나머지 일상을 보낸다. 행복들을 잃고 싶지 않다. 내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볼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선다. 아, 이래서 으른들이 그렇게나 책을 읽으라고 했던가, 싶기도 하고.
어른은 그냥 어른일 수 없다. 판단에 책임을 져야 한다.내 행복은 공짜가 아니다. 단지 내 월급으로만 치를 수 있는 가격이 아님도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