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망상

목 뒤의 칼

by 이븐도




60 이후의 삶에 내가 제정신으로, 잘 걸어다니며 살고 있다면 나는 그걸 행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병원에 들어앉은 환자들은 매번 다른 강도로 인생에 들어왔다. 어쩌면 그게 내가 20대 내내 월급과 함께 저축한 데이터인지도 모른다.






방이숙은 천재용의 아버지에게 '저는요, 가구공방을 하나 운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애도 한 다섯쯤? 낳구요.' 라고 한다. 기업 회장을 한여름 동네 놀이터에 앉혀 놓고 쭈쭈바를 대접하면서. 장백기는 함께 소주에 절여진 상태로 용산 사우나 앞에서 양말과 팬티를 팔고 온 장그래에게 '그래도, 내일 봅시다' 한다. 하우스 박사는 캐머런에게 '아름다운 여자들은 의대에 가지 않지'라고 한다. 또 열받는 소리 하는구나 하고 빡치기 시작하는, 확실한 미인인 그녀를 앞에 두고.


넝쿨당에서 천재용이 쓰던 휴대폰은 갤럭시 S3였고, 미생의 등장인물들은 S2를 쓴다. 떠올려 보면 그 때 반에는 노트 4를 쓰는 애들이 있었던 것 같지만. 하우스? 이십 년은 넘은 드라마니 뭐 모토로라나 블랙베리 노키아 아니었을까. 사실 전화를 하는 장면은 기억이 안 난다. 삐삐처럼 생긴 호출기만 엄청 본 것 같다.

S24를 쓰는 나는 27이 나오기 전까지 내 휴대폰이 멀쩡하기를 바란다. 23을 쓰는 친구가 아직 멀쩡히 쓰는 걸 보면 나한테도 희망은 있다.



이숙이는 꽤 똑똑한 아가씨였구나 생각했다. 저렇게 자기가 원하는 걸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니. 그리고 하나 더. 이제 나에게는 누구도 저런 걸 묻지 않는다는 것. 20살때까지는 저런 질문을 도처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젠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묻는다. 누군가 내게 '아가씨는 십 년 후에 머가 되어 있을 것 같노?' 라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7년 전, 처음으로 병원 실습을 갔다. 국립재활원. 미아사거리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건물이 컸고 동네 병원 말고는 갈 일이 없었던 내 눈에도 병원 복도가 넓었다. 간호사들은 크게 바쁜 것 같지 않았고 환자들은 멀쩡해 보였다. 하늘색 줄무늬 상의에 남색 바지를 입고 학교 마크가 그려진 이름표를 단 채 오랜 시간 서 있기 연습을 하고 가끔 보호자들이 깎은 사과를 얻어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미아사거리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거기 있던 랄라블라에서 삐아 틴트나 데메테르 향수를 샀다. 봄이라 비가 자주 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의 병원. 재활의학과가 궁금했고 얄미웠다. 애들이 손이 좀 안 가기 시작하면, 더 이상 내 머릿속까지 찢어낼 것처럼 울거나 헛소리를 하거나 침대 난간을 타고 넘어오려 하지 않으면, 항경련제를 잔뜩 투약하고 또 재워서 뇌파검사와 MRI를 찍는 일의 순환이 잦아들면, 그래서 그냥 수액도 정맥주사도 없게 되면 그들은 재활의학과 병동으로 떠났다. 그럼 그 자리로 또 어떤 이유로든 잔뜩 아픈 애들이 입원했다.





인생이 60살까지라는 개똥철학이 생겼다. 내 망상이길 바라지만 이건 내가 시간을 들여 쌓은 데이터가 산출한 결과인걸. 내년 10월까지 1억을 모으기로 했다. 당장 출퇴근 빼고 모든 외출을 금해야 하는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된다. 안 그만두고. 그게 중요하다. 그만둘 것 같지는 않다. 지금처럼 징징대면서 다니겠지.


내년, 나는 서른. 윤석열 나이가 어쩌고 하는 거 빼고. 그냥 내가 살아온 그대로는 서른. 1억은 큰 돈도 작은 돈도 아니다. 뭘 할 수 있는 금액도 아니다. 그냥, 가장 건강할 나이에 교대근무를 하면서 내 노동력과 바꿔낸 증표 정도.

지금은 내가 달랑 면허 하나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시기다. 금액을 생각하면 이런 표현이 상당히 우스운데 사실이다. 뭔가를 더 하지 않으면 당연히 지금에서 머물 것이므로, 최대치가 맞다.





재활원의 환자들은 멀쩡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수액도 말초정맥관도 케모포트도 기관절개관도 안 보여서 그래 보이는 거였다. 그 때 내가 2주간 본 환자들은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한쪽 몸이 내려앉아 있거나 몸 전체가 어디에 짓눌린 것 같았거나 그 어느 쪽도 아니라면, 정신이 그래 보였다. 대부분 휠체어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병원이 넓었다. 병실이 많아 넓은 게 아니라 애들이 적은 시골 학교처럼 넓었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보호자들이 우리와 이야기했다. 이미 다 과거형이 되어 버린, 자랑은 아닐 것이나 혹시 자랑일지도 모를 이야기들.


KT에서 일을 아주아주 열심히 하는 에이스였으나 어느 날 쓰러지더니 이렇게 된 아들, 호주로 어학연수인지 워홀인지를 떠났으나 다이빙을 하다가 이렇게 됐다는 오빠, 뭐 또 비슷한 류로 쓰러졌다는 잘생긴 남편. 나와 실습조였던 애들은 무슨 체조 같은 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가서 실습을 마쳤다. 거기선 그런 걸 많이 한다고 했고, 실제로 많이 했다. 재활이니까. 그 때 나는 가여워하는 표정을 과하게 짓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말을 못 하는 이들이 새파랗게 어린 내 표정에서 지나친 연민을 읽지 않도록. 그들은 남이었으나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그런 표정쯤 짓는 게 예의니까.






졸업 후 대문구에서 일했다. 다이소 한 번 가려면 30분은 걸어야 했던 그 동네도 싫었고 태움도 싫었고 중증도에 비해 후진 병원 시설도 싫었다. 지원했던 병원에 모두 떨어져서 어쩔 수 없었다. 옆의 호흡기병동과 더불어 가장 퇴사율이 높았다. 나는 거기서 항암을 하고 수혈을 하고 흉관 관리를 하고 비위관 피딩을 하고 단순도뇨를 하고 석션을 했다. 그러니까 그냥 간호사 일을 했다. 그러다 지금의 병원에 다시 원서를 넣어 합격했다. 그렇게 퇴사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별로 그렇게 빡센 환자들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의 병원으로 왔을 땐 처음 보는 게 더 많았던 걸 보면. 처음인 교대근무가 힘들었고, 학교가 아닌 곳에서 뭔가를 하는 게 낯설었고, 그렇게 진짜로 짓물러져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처음이라 그렇게 기억하는 건지도.





6개월을 합법적 백수로 시간을 보냈다. 행복했다. 4년 전 3월 발령 메일을 받고 본가를 다시 떠났다. 생각지도 못한 소아청소년과에 배치되어 근무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었다. 그들은 가까운 내 미래일 수도 있었고 확실한 과거일 수도 있었다. 보호자들의 모습이 그랬고 애들이 그랬다. 어쩌다 보니 산부인과 환자들도 보게 됐다. 그리고 그들은 반쯤은 더 확실한 내 미래였다. 동년배도 있었고 더 어린 사람도 있었으나 아무튼 여자였고 자궁은 암이 전이되기 쉬운 곳이었다.

슬슬 연차 비슷한 것을 채워가자 인생은 절대 공평하지 않으며 언제나 예측할 수 없다는 걸 믿게 됐다. 그 기분 나쁜 가설의 확정을 피하려 달리기와 글쓰기에 매달렸다. 그러려고 시작한 것들이 아니었으나 그렇게 됐다.






대학생 때 유명 작가의 강연을 본 적 있다. 의사였다. 그는 아주 피곤한 표정으로 등장해 너무 간단한 형식의 파워포인트를 띄워 놓고 뭔가를 계속 말했다. 신촌 쪽이었다. 아줌마들이 많았고 아마 시간을 때워야 했던 공익요원들이 있었다. 어떤 내용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고 사실 좀 졸렸다. 저렇게 하기 싫고 피곤하면 하지 말지 생각했다. 한두 시간쯤 지나 끝날 때가 되자 그가 마지막 멘트를 했다. 건강하시라고. 그 말만은 정말 진심 같았다. 그 간단한 말이 어떻게 저렇게 눅진하게 나올 수 있나 생각했다. 뭘 좀 이해해보고 싶었는데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그냥 뭐 별 거 없네 하고 혼자 한강공원에 갔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종 그 때의 그 말이 그렇게 들렸던 기억에 대해 생각한다. 십 년 앞을 기약할 수 없게 된 게, 의도치 않게 너무 많은 망가진 표본을 봐서 그런 건지, 그냥 그런 질문쯤 덮어두고 게으르게 지냈던 탓인지는 모른다. 둘 다겠지. 십 년 후. 십 년 후라. 나는, 사람들은 당장 내일 오후의 안녕도 보장하지 못했다. 거창하게 인생씩이나 거론할 것도 없이 그냥 이 유기체 자체의 내구성이 그랬고 세상은 변수가 많아 험했다. 그렇게 고장난 것들을 고치거나 보전하려 병원이 있었다. 십 년. 지금에서 십 년이면 서른아홉인데.







뭘 특별히 한 기억이 없는 2월. 출근하면 병원 로비의 헌액자 명단이 먼저 보인다. 나는 돈도 권력도 가질 수 없다. 다음 주에 내가 지금처럼 멀쩡히 살아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지만 그건 확실하다. 의뢰서가 없으면 누울 수 없는 병상, 아니면 살아서 예전처럼 나갈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입원할 수 없는 곳. 누구 교수나 조교수의 지인인 경우 해당 과 질환이 아니라도 수술을 했고 시술을 받거나 검사를 했다. 아니면 대우라도 받게 돈이라도 많아야 했는데 난 아니지. 시스템 브레이커들. 그게 권력이지, 뭐.




2월 내내 본 레지던트 A. 그는 92년생이었고 전공의를 하고 있기엔 나이가 좀 있었다. 왜 저렇게 열심히 살긴. 여기서 한 자리 하거나, 나가서 개원을 하거나. 혹시 뭐 먹여살려야 할 애가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고. 거기 항상 붙박이처럼 있던 게 월말에야 눈에 들어온 거였다. 그는 키가 크지 않았고 새치가 엄청났다. 허옇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나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보일 때, 그래도 사람이긴 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레지던트 B. 그녀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자였다. 얼굴도 작고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작았다. 요정처럼 생겨서 왜 의사를 하나 하는 촌스러운 생각도 한 번 했다. 사실 11월에도 12월에도 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때도 좀 주눅들어 있었고 업무가 손에 안 익은 것 같았으며 감히 간호사인 내가 연민을 느낄 만큼 보는 환자가 많았다. 며칠 전에 그녀는 병가를 냈다. 혹시 대상포진이라도 걸렸나 했더니 정말 그 다음날 그녀의 얼굴에는 사선으로 벌건 수포가 줄줄이 나 있었다.





뭐하면 굳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연애프로그램에 나가거나 인플루언서 같은 걸 해도 되는 거 아닐까 생각했다. 왜 저렇게 힘들게 살지, 이미 가진 게 많은데. 그래야 더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러나 병원은 너무 흉한 환경이었다. 냄새나고, 더러웠고, 시끄러웠고, 우악스러웠다. 보호자들은 왜 교수도 아닌 니들이 말을 돌리냐고 멱살을 잡기도 했고 걱정은 많았다. 이미 다 끝난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 거면서. 슬픔과 종말에 일일이 공감하는 표정도 보이면서 알아듣게 설명도 해 줘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 감당할 수 없어 보였다.


간호사들이 일차적인 응대는 했으나, 정 답이 없을 경우 의사를 불러야 했다. 얕은 것이나마 그게 그들이 가진 권위였으니까. 정말 막다른 골목에 서서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쏟는 이들을 표면적으로 잠재울 수 있는 건 그들의 서술뿐인걸. 여긴 정말 그들도 버티고 또 버텨내는 곳 같았다. 뭔가를 위해서.





굳이 동료들이 아닌 애꿎은 의사들을 생각한 이유는,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내 다음 30년에 결혼과 육아를 빼면 뭐가 있을까 생각해서 그럴지도. 그들은 십 년 후 이 병원에서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거나, 그에 비견하는 지위를 갖고 있겠지. 그렇게 잘난 사람들도 끊임없이 구르면서 살았다. 멀쩡한 상태의 인생. 어딘가에 닿기 위해 멈추지 않고 발길질하거나, 정신 질환을 피하기 위해 발악하거나.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나한테도 시간이 있긴 한데. 30년 남았는데. 내년의 1억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몇 년간 일했기에 당연한 건데. 그 일차적인 목표가 끝나면 난 뭘 해야 할까. 부잣집 막내아들인 천재용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인 방이숙도, 엘리트 장백기도, 명석한 바둑기사 장그래도, 결핍 있는 미녀 캐머런도, 천재 또라이 하우스도 아닌 나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아침엔 지아가 좀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여섯 시 오십오분, 채혈도 투약도 없는 날의 나이트가 끝나가는 시간에 그 쪼끄만 애가 아빠에게 안겨 몸무게를 재러 나오길 기다렸던 시간. 다 지워 버린 사진을 좀 후회했다. 어떻게 살려낼 방법이 없나도 잠시 생각했다. 인스타의 근황을 보면서도 아쉬웠다. 그럼 사실 나는 잘 지내는 그 아이가 아닌 그 추억을 보고 싶은 건데. 그걸 느끼자 사진을 지운 게 그새 아쉽지 않아졌다.


날이 정말 따뜻해졌다. 3월 말, 엄마아빠가 나를 분당에 내려 줬다. 저녁때 남자친구가 건 전화를 받으며 다이소에 갔다. 사실 나는 그 때부터 그 사람과 명백히 헤어지고 싶었다. 앞뒤없이 좋았던 건 한 달쯤이었고 이미 나는 정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걸 문득 오늘 알았다. 난 사실 싫었구나. 몸서리쳐지게 싫었던 구석에 경멸을 못 감추면 걔는 그걸 귀신같이 알았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삶이 좀 두려웠다.

삶보다는 새로운 시작이, 또다시 적응해야 할 환경이 공포스러웠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말하지 못했고 연락처를 차단하지도 못했다. 그냥 그러면 제때 끝나는 건데. 그렇게 2년을 만났다. 원래 연애는 좀 언제 얘랑 헤어지나 하는 생각을 참고 하는 데이트의 연속일까, 를 늘 떠올리면서.





고개가 앞에 달린 이유가 있다. 돌아보지 말란 뜻이다. 앞에 놓인 게 뭔지를 정확히 볼 정신이나 챙기란 뜻이다. 달리기. 다리를 쓰는 움직임이지만 눈을 감으면 백 프로 넘어지게 되어 있는 웃긴 활동. 근데 사실 모든 운동이 그렇겠지. 방향감각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목적지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령 다다르지 못한다 해도 그랬다. 멀끔한 모양새로 출퇴근하고 사람들과 웃다가도 생은 언제나 고꾸라질 수 있었으므로. 그런 이유로, 순간은 절대 헛되어서는 안 됐다.


설령 운이 좋아 그러지 않더라도 반드시 다 병들고 삭아 버릴 테니까. 그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이 글은, 내 데이터는 망상이 아니다.

너무 사실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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