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터리아

음주가 용인이 안 되는 이유

by 이븐도



다 알고 그랬을 거거든.

그러면 좋을 거라는 거.






집에는 아직도 작년 강릉 홈플러스에서 사 온 소다 호루요이가 있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어제 한 병 마신 생수가 다시 채워져 있다. 청소를 해 달라는 요청은 이런 것까지 포함이었구나. 쉬운 일이 없다. 청소도 사실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제 산 흑임자 비스킷을 떨어뜨려서 어쩔 수 없었다. 깨알같이 박혀 있던 깨들이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3일은 꽉 채워 있어야 하는데 방치해서 벌레라도 생기면 어떡해.


일 년이나 됐다.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없어서. 아마도. 없다. 호루요이. 달긴 한데 딱히 취한다고 하긴 애매한 술. 그래서 남은 건지 모른다. 유통기한은 적잖이 남았다. 그걸 확인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지만. 돌아가면 그냥 버려야겠다.





서점이 웃겼다. 지금 보니 웃기다. 대체 얼마나 자의식이 강력해야 그렇게 본인 뿌리에 관련된 것들로 공간을 채울 생각을 하지. 다 망가진 엉터리 영어로 서점 주인과 대화했다. 몰랐어도 사 가려고 했다. 내가 그 책을 들고 있자 주인 여자, 아니 점원이 말을 붙였다. 그 책 이 서점 주인이 쓴 거라고. 흥미로웠다. 그렇게 몇 마디를 했다. 이래서 독립서점 같은 데는 가면 안 된다. 읽지도 않을 걸 사 오기 때문에.


재작년인가 어딘가의 독립서점을 친구와 갔다. 상수? 망원? 여튼 뭐 그 비슷한 동네. 주인이 말을 붙였고 책을 샀다. 정작 거길 가보자고 했던 친구는 사지 않았고 나는 샀다. 두 권. 하나는 읽다 말았고 하나는 그 날 서점에서 펴 본 이후로 손댄 적이 없다. 무겁기만 더럽게 무겁다. 중고로 팔아봤자 천 얼마나 받을 테니 그냥 그렇게 처박아두게 될 것이다.




올라오는 층계에 붙어있던 포스터의 책이었다. 일러스트가 귀여웠다. 귀여운 게 맞겠지? 귀여웠다. 챗지피티에게 앞뒷표지와 작가 소개를 찍어 보냈다. 병 어쩌고. 현대인의 심리적인 문제 같은 걸 병력처럼 나열한 게 흥미롭다는 답변이 왔다. 흥미로웠다. 작가 소개는 열받았다. 아마 대만에서 태어나 말레이시아에서 학교를 나오고 영국으로 유학을 간 의사. 초엘리트 다국어 화자 도련님이 쓰는 소설은 어떤 걸까.

취미생활 한 번 비싸다 생각했다. 사실은? 미치게 부러운 인생이라고. 그리고 하나 더. 이런 인간도 마음을 어디 못 붙여서 글을 쓰고 이야기를 꾸며내는구나. 호화로운 삶이다. 인간이란. 그 아무것도 아닌 자아를 어쩌지 못해 가엾고 한심한 게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대만 대학병원에 갔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병원 본원 같은. 어린이병원이 따로 있었다. 8시가 좀 넘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역시나 비닐봉지에 뭘 가지고 움직이거나 비닐봉지에 넣어서 돌아다닐 걸 사고 있었다. 이렇게나 먹는 것에 진심인 나라라니. 그런데도 딱히 살찐 사람들이 많진 않다는 게 신기했다. 병원. 나는 놀지만 남이 일하는 건 흥미로우니까. 그리고 병원은 원래 아무것도 아닌 식으로 흥미롭지.

치킨맛 쫄병스낵을 먹으면서 트립닷컴에 9시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여기 시간으로 8시. 여권 이름에는 E가 없는데 내가 결제한 항공권에는 E가 있었다.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잘못 입력한 거지.

이걸 해결하느라 어제는 탑승 십 분 전에 에스컬레이터를 걸으며 브리핑하듯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굉장히 바쁜 현대 여성 같은 게 된 것 같았다. 왜. 멋지잖아. 외국 가는 비행기 시간에 임박해서 바쁘게 전화를 하며 걸어가는 거.


중정원 같은 곳이었다. 어제 전화한 직원이나 오늘 이 직원이나 억양이 특이했다. 중국어를 지나치게 잘 하는 사람인 건지 아니면 중국인인데 한국어를 잘 하는지 아리송한 어투. 어쨌든 그들은 친절했다. 그냥 치킨맛이 아니라 약간 맵싸하다 싶었더니 후추가 박혀 있었다. 팔자가 좋았다. 남의 직장에서 과자 까먹으며 시간 보내기. 애들 손을 잡은 젊은 엄마며 아빠들이 역시나 도시락을 들고서 애를 거기 인계하고 떠났다.






거의 금발인가 싶게 밝은 머리에 원피스를 입고 부츠를 신은 내 차림새가 웃겼는지, 아니면 누가 봐도 외지인이었는지 한 아주머니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나한테 그러실 필요 없다는 말을 파파고로 치는 와중에 그 아주머니는 나를 다른 아주머니에게 데려갔다. 얘 좀 도와줘, 같았다. 그래서 그냥 다시 쳤다. 어린이병원으로 가면 어디로 가야 해요.

그녀는 나를 친절하게도 그 로비 같은 곳 가장자리까지 데려간 후 넓고 낡은 복도를 보며 저 끝까지 걸어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영어로 말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모든 순간이 올 때마다 망설였다. 그대로 여기서도 쎼쎼, 라고 해도 되나 싶어서. 대신 웃으며 고개를 많이많이 숙였다.


병원에는 영어와 한자가 병기된 표지가 정말 많았다. 어린이병원 따위 묻지 않고 싸돌아다녀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또 모르지. 어쨌거나 내가 다다른 곳은 사내 어린이집이었다. 그 너머로 가자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직급대로 나와 뭐라 떠들며 걸어갔다. 그 일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의 사회생활 모습. 가는 길에 중환자실도 봤고 주의사항도 봤고 휠체어를 탄 사람도 봤고 거대한 밀폐용기를 실은 카트를 끌고 가는 사람들도 봤다. 어디나, 다를 게 없었다. 신기했다.



하루의 중반쯤 왔을 때는 그냥 로또 당첨이나 되는 게 장땡이다, 라고 생각했다. 돈이 최고였다. 돈이랑 새로운 거. 어린이병원은 오래됐을 연건의 그곳보다 넓고 깨끗했고 밝았다. 14층 병동 입구쯤에 십오 분은 늘어져 앉아 있었는데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외래. 그리고 2층.

유모차 아래에 이동용 석션기를 실고 아이를 태운 날씬한 엄마와 치과 외래 앞에서 휠체어에 앉은 삐쩍 마른 애의 뱃줄에 50cc 시린지로 뭘 밀어넣고 있는 여자를 봤다. 그냥 기침이나 하는 뽀송한 애들도 있었다. 말끔하고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어린애들과 부모와 빵집과 붐비는 창구와 애를 보고 직업인의 미소를 짓는 직원.





의사씩이나 되어서 인생 더럽게 피곤하게 산다고 느꼈다. 아사히 드라이 한 잔 반에 뭔 화이트와인 작은 거. 낮에, 아빠에게 아빠 그럼 이거 제목 읽을 수 있어? 하고 찍어 보냈더니 병, 동성애. 남자. 어쩌고라고 해석했다. 챗지피티는 다르게 봤다는 말을 답장으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냅뒀다. 딸 취향을 알아놓으라는 뜻으로 보낸 건 절대 아니었는데. 근데 그걸 이 나이에 설명하는 게 더 웃기잖아. 해명해야 해, 그렇다 해도?


본문을 챗지피티에게 한 바닥 한 바닥 찍어서 보냈다. 말이 소설이지 자전적 얘기 같았다. 국적, 지위, 돈, 대만, 말레이시아. 성적 지향성. 태국. 직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기분이었고 공부는 열심히 해서 의사는 되었으나 그건 내가 바라던 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는 해석. 누군가가 돌아가야 할 대상처럼 느껴졌으나 그 사람은 집도 뭣도 아니었다는 그런 설명. 아저씨. 그런 걸 고독이라 하는걸요.

숙소에서 다시 나와 한참을 걸어 향한 곳. 결국 또 지하철역 근처의 차선책. 카페인 줄 알았으나 저녁이 되니 술집이 된 거기서 그걸 읽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이런 얘길 쓰려고 2백 쪽짜리 책을 만들어냈다니. 하다 보니 의사가 돼? 까고 있네, 죽을 만큼 노력했을 거면서. 참 대가리 아프게 산다 싶었다. 누군지는 앞으로도 모를 중화권 작가 양반.






성매매하는 여자와 성관계를 갖는데 그건 거래일 뿐이고 본인이 바랐던 건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서술. 여자는 능숙했고 오히려 그를 보살폈다는 설명. 알고 보니 태국에서 일한 간호사였고 집을 사기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 싱가포르에서는 그곳에서의 20배를 벌 수 있다고. 그러고 그녀는 그에게 동정하지 말라고 한다. 나 같은 외국 여자의 생계 형태를 니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의사가 기술직인가?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는 실격이었다.

환자들의 어떤 이야기에는 지나치게 몰입했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굳이굳이 이미 별로인 행위를 돈 주고 하면서도 인간성까지 다 챙기고 싶어하는 거겠지. 본인의 마음에도 그렇게나 감각을 세우는 탓에.




역시 글 쓰는 인간치고 깊이 알면 너절하지 않은 유형이 없다는 걸 그 대목을 읽으면서도 느꼈다. 엄청난 문화활동이었다. 타국, 모르는 글자. 맥주 한 잔에 고개가 마구 돌아가는 미친 가성비로 올라오는 취기. 인공지능이 해석해 주는 텍스트. 구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다 모르는 채로 받아먹는 설명. 하필 뭣도 모르고 고른 책이 이딴 내용이라니. 그래서 열받았다. 나는 하루 종일, 여기서도 또 계층을 느꼈는데 중국어에 영어를 쌍으로 하는 초엘리트 전문직 남성의 성적 지향성 및 정체성 고민에서 오는 서사에 공감하게 되다니. 안 취했으면, 한글로 쓰여 있으면 읽다가 때려치웠을 책. 자아의 확장과 해석.






이곳에서도 간호사는 비슷하게 생긴 카트를 끌고 일했다. 사실은 병동 안까지 들어가봤다. 아무도 제지를 안 하길래. 아무도라기보단 그런 시스템 자체가 없는 것 같기도 했고. 그렇다고 그게 막 들어오란 뜻은 아니겠지만. 누가 봐도 트레이닝을 받는 중인 듯한 신규가, 분당 어딘가 그 병동의 여자애들을 복사해서 데려다 놓은 것 같은 자세로 컴퓨터 앞 선배 옆에 앉아 있었다. 혈압을 재는 소리. 연차며 짬이 다 다른 의사 서넛이 도는 회진.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종이봉투와 커피를 들고 병실 문을 여는 누군가.


타이페이 중심 기차역 부근을 지나자 노숙자들이 많았다. 노숙자라고 얼굴에 써붙이지도 않았고 그랬다 한들 못 읽었겠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들. 거기로 향하는 어떤 건물 앞에서는 하이힐을 섹시하게 신은 여자가 샤넬 가방을 멘 채 정장을 입고 걸어갔다. 그녀가 지나간 건물 골목에는 비슷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기대서서 담배를 태웠다. 아픈 애들, 안 아픈 애들. 잘 나가는 직장인. 구걸하는 사람. 단체 관광객. 결국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편의점이나 엄청 들락거리는 나. 애를 안고 아마 기차에서 먹을 간식을 사는 세련된 젊은 엄마. 나보다 어린 것 같은 이십 대 애들.





제기동 약령시장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카페 커피값은 성수만큼이나 비쌌다. 결제하고 보니 그랬다. 향 냄새가 짙게 나고 중간중간 외국 플래그십 스토어들이 그 건물 특색을 맞춰 입점해 있고 한 커플은 웨딩 스냅을 찍는 중이었다. 거기서, 지하철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위치를 찍었다가 지나친 서점이었다. 서점인지도 몰랐던 곳. 원래는 그냥 영어 원서만 들춰봤다. 그나마 알파벳은 읽히기라도 하니까. 다 뭐 말레이시아며 싱가포르 같은 특정 지역과 연관이 있길래 의아하긴 했다.


어쩌다 여기서 일하게 되셨냐고 물으니 그녀는 이 서점 주인, 그러니까 그 책 작가의 여동생의 친구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연줄이라는 거지. 그게 뭐 어떻다는 건 아니고. 나 같은 관광객도 상대해야 했고 이벤트도 기획해야 했으며 기타등등 하는 일이 많았다. 그녀에게는 그래도 그냥 일일 그것. 아마 최저시급쯤은 받을까? 그래서 그 시점까지도, 여기가 아무리 작은 출판사라지만, 그런 공간을 꾸미고, 독립이며 자아며 사랑에 대한 책들을 골라 큐레이팅할 곳을 만들며, 본업은 따로 있으며, 최소 2개국어에는 능통할 그 사람의 인생이 참 부러웠다. 그러면서 글을 써? 뭐가 부족해서. 원래 글은 부족한 인간들이나 쓰는 건데. 결핍을 견디고 살아야 해서. 팔자하고는, 씨. 얼마나 더 갖고 싶은 거야.





가려고 했던 카페로 향하는데 갈수록 간장과 한약 냄새가 줄더니 아예 펜디 쇼윈도가 나왔다. 가방만 진열된 것도 아니고 옷이 주르륵 걸려 있는. 부쉐론, 버버리, 또 뭐더라. 알고 보니 미츠코시 백화점 내부의 지점이었다. 안에는 쇼핑백을 잔뜩 테이블에 올려둔 남녀 둘만 있었다. 어떻게 들어가. 그래서 다시 돌아갔다. 어쩐지 잘사는 동네 같더라니. 골목을 지나치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이런 집들은 얼마나 할까. 외관이 허름하다고 다가 아닌걸.

안에서 비쳐 나오는 빛이 다르다고. 다 리모델링해서 사는 거잖아. 힙한 레스토랑. 식당. 그런 경제적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냥 모양 좀 내고서 친구와 갔던 그런 느낌의 공간들. 망한 인간관계와 앞으로도 희미해질 것들이 기온 이십 도 저녁 공기에 쓸려 나갔다. 어차피,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거.






화자는 월세가 버는 돈의 5분의 1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냥 직장인 수준이라고. 그가 마음을 주고 돌아올 집처럼 생각했던 상대는 정작 그를 두고 돈 잘 벌잖아, 하는 식으로 대한 모양이었다. 5분의 1? 내가 월세 명목으로 내는 게 얼마더라. 거의 백 만원이지. 그럼 씨, 나보다 낫잖아. 물론 낫겠지. 의사인데.


펍인지 카페인지 아무튼 이제 중요하지 않아진 가게 바깥에서는 백인 중년 남자가 아직도 클라리넷 같은 걸 불었다. 왜 저러고 사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다 똑같이 죽는 인생. 지나가고 잊히는 와중에 바꿀 수 없는 것만이 남는다면. 이십 배? 집을 사려고? 그럼 할 만 하지.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못해 먹을 짓은 아닐지도 몰랐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은 아니라고. 집이 얼마나 중요한데. 챗지피티는 자꾸 주제넘게 이런 걸 비판을 잘했다, 이게 잘 쓴 지점이다, 하면서 되도않는 자아를 넣은 해석을 보내왔지만.




비판은 비판이고, 세상이 생겨먹은 건 또 그런 거라고. 어떻게든 이용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읽기도 하는데. 설령 그게 내 어떤 도움도 필요 없는 사람이라도. 취하니 생각에 필터가 사라졌다. 소주잔만한 걸 직원이 주고 가길래 뭐냐는 뜻으로 고개를 들었더니 화이트와인 포 유, 했다. 쟁반을 든 모양새가 스타벅스 신상 디저트를 샘플로 주는 거랑 똑같았다.


그거 한 잔, 맥주 한 잔 반. 한국 돈으로 만 원이나 했던 맥주. 돈이 아까워 다 마시려 했는데 더 마셨다간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왔다. 눈에 힘을 더 주고 자세는 더 반듯하게 펴고 숙소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나는 눈에 힘만 준 전형적인 취한 사람이었다. 취한 게 그렇지 뭐.





손도 씻었고 발도 씻었고 워치도 충전기에 붙였으며 가방에서 오늘의 물건들은 다 빼냈고 워커에 신문지도 넣었다. 입었던 옷은 옷걸이에 걸었고 오늘의 일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아는 거지, 술 마신 스스로가 편한 만큼 한심하다는 걸. 어른이 되어 놀러 와서 좋은 점이다. 혼자 이렇게 엉망으로 있어도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 이제껏 남과 마신 술이 아깝다. 어차피 취할 걸 걱정해 보조만 맞췄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나는 이걸 알아서 잘 마시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만. 중국어. 센 억양.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렉서스 또는 테슬라나 아우디. 한국보다 긴 횡단보도 신호. 중간에 먹었던 숙취해소 젤리에서조차 한약 맛이 났다. 이건 오리역에서 산 건데, 트레블월렛 카드 찾으러 갔다가. 분명 망고맛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꺼내 보니 까만 갈색에 씹으니 한약 맛. 안성맞춤이잖아? 여기랑. 절묘하다구.




와중에 메타인지는 쩐다. 내가 가진 능력치 중에 그래도 자부할 수 있는 것 하나다. 주제파악은 꽤 하는 것. 혼자 마시는 술은 위험하다. 알았던 거지. 나는, 잘하면 알콜릭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걸.


좋다. 당초 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즐거움 찾기.

뭐 같은, 계급과 자아와 돈과 본능 같은 인류 보편적 주제를 다룬, 알아먹지도 못할 책을 인공지능에게 읽히면서 그걸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괜히 생각하게 되는 거. 나만 이렇게 등신같이 사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거. 공감이다. 공감. 생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 이제 연락할 일 없어진 그녀가 말했던 공감. 이래서 술 마시는구나. 뇌 빼고 놀려고. 이래서 더한 것도 하는구나. 이래서 알겠다. 용인하면 안 되는 거란 걸.



나 자신을 칭찬하는 밤이다.

이제 이러고 놀 줄도 안다고. 진짜 어른이다.

취기의 끝을 잡아줄 호루요이는 요구르트 맛. 애들 맛 어른 맛 고루고루. 이게 재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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