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 말미암아 살아남으리
더 폴 : 디렉터스 컷. 2024
1. 15000원/ 약 2시간
2. 재관람 의향 : 있음
3. 추천 : 가능
4. 동행 : 온전히 혼자 즐기기도 아깝다.
5. 영화관은 이런 걸 보라고 존재합니다.
근데 아저씨, 구원은 셀프예요. 도움은 받을 수 있다 치지만 애한테 약을 훔치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이 한심한 인간아.
잘생긴 얼굴과 좋은 목소리에 깜빡 속았다.
사막 가운데의 거대한 나무 기둥, 아랫부분이 핏빛으로 물든 흰 천, 먹고 마시고 잠들지도 않지만 지치지 않는 사람들, 발길 닿는 대로 바다에서 평원으로, 수풀로, 말라 비틀어진 황무지로, 토착민들이 그들의 언어로 떠들며 모여들어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내가 영웅이 되어 모든 이들을 구출해 내고 사랑을 이뤄낼 곳으로, 발 딛고 선 땅 저편의 수많은 넓고 먼 곳들로. 시리도록 쨍하고 깊은 장면들로.
그 안에서 나는 아프지도, 겁을 먹지도, 배를 곯거나 목이 마르지도 않다. 한낮의 황금빛 꿈이다. 내 신념과 욕망, 마음만큼이나 진한 색채를 띤 이 현실.
비록 나는 허상을 만들다 추락해 병원에 누워만 있지만, 며칠을 자지도 먹지도 않아도 괜찮기는커녕 잠을 이루지 못해 한낱 헛소리를 길게도 떠드는 어른이지만, 이 꿈이 너무 달다.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이 무의미가 나를 살게 한다.
밖에는 눈이 왔고 좌석에는 사람이 잘못 앉아 있었다. 이 줄이 H가 아니라 I열인 줄 알고 있던 남자는 내가 말을 건 후에도 본인 자리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빈 자리에 앉았다. 사람이 꽤 많았지만 그 자리에는 애초 주인이 없어 다행이었다.
아이는 이국의 말을 쓰며 영어를 배워가는 중이고, 그 키와 체격으로는 어려울 게 분명한 오렌지 따기를 하다가 병원으로 왔다. 남자는 환상 속의 장면이 되려다 추락해 병상에 누워 침잠한다. 오렌지 나무에 오르는 것과 영화의 액션을 소화해 내는 것은 둘 모두에게 현실이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 중에 그들은 부상을 입고 세상과 잠시 유리되어 고여 있는 것이다. 노동은 가끔, 또는 자주 가혹했을지도 모른다.
자리에 누워 정신만은 멀쩡한 채로 지나간 애인과 한심한 자신과 평생 이기지 못할, 패배하기만 할 대상을 생각한다. 나는 다시는 날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전에는 그게 비행인 줄 몰랐는데 추락해 부서져 보니 날갯짓이었다.
누런 필터가 씌워진 듯한 민트색 벽, 단단한 병원 건물, 오렌지가 실린 트럭, 사각의 얼음에 혓바닥을 댔을 때의 맛, 앞니가 벌어진 통통한 소녀, 볼을 발그레하게 칠한 아리따운 간호사, 그리고 간절히 진통제와 수면을 원하는 나. 활공하고 달리며 장면 속 환상의 일부가 되었던 나는 이곳에 묶여 세상이 도는 걸 기다리고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한다.
나는 잠들지 못해 꿈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대낮의 햇빛이 비쳐 지나가는 오후의 병실에서 뜬 눈으로 꿈을 꾼다. 화난 사람들이 집을 불태워 버렸다고 간단히 말하는 소녀에게 주절주절 말을 건넨다. 의젓한 소녀는 아직 아는 것이 없어 고통과 사연을 길게 말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서 혀가 짧은 탓에 어른들처럼 본인의 아픔을 장황히 드러낼 줄 몰랐다.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여자 하나를 잊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서 헤어나오지 않는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으나 그 고통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는다. 아,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
꿈속에서 나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바라던 고통과 불면이 멈춘 후부터, 그 환상의 세계에는 균열이 온다.
무법자는 앞뒤 없이 달려 사랑을 쟁취하고 싸울 것 같았지만 '뽀뽀시켜요' 하는 소녀의 말에 몇 번을 멈춘다. 맞닥뜨려 결말을 보는 게 싫었던 거 아닐까. 키스 후에는 보통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이야기가 끝나기 마련이잖아.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고난을 만들어내줘야 한다. 그래야 스토리는 끝나지 않으니까. 이야기가 완결되면, 나는 어디에 가서 쉰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그들의 사랑을 매듭지어주는 대신 결혼식이니 뭐니 하며 엔딩을 미룬다. 오디어스와 면대면으로 싸우기 전에는 그 어느 것도 본인의 손에 넣어 잊을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낡은 환자복을 입고 손질되지 않은 -하지만 너무 잘생긴, 아니. 진짜 너무 잘생겨서 화면을 보는 게 바쁘다- 머리를 하고 반쯤 풀린 눈을 한 나, 멋진 조끼를 입고 오른손을 들어 포즈를 취한 단단한 눈빛의 짧은 머리 무법자. 무법자는 이곳에 누운 나를 닮았고 이따금 복면을 쓴 무법자는 나를 닮았다.
꿈속의 나는 약병을 쥔 채 당신과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 후 시선을 돌려 직면을 피한다. 여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 그는 당당했으나, 그녀가 얼굴을 모두 드러낸 후에는 결론적으로 늘 도망을 친다.
거대한 성벽, 궁전, 평원, 사막, 바다, 코끼리. 조악한 분장과 고된 노동으로는 재현하기 힘들 거대한 장면 속에서 나는 달리고, 싸운다. 사실은 그러고 싶었던 것이다. 원한을 물고서, 단전에서 끌어올린 각오와 용기와 행동력으로 모든 것을 부수고 물리쳐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연기와 모사가 아닌 진짜 삶의 모습으로. 그 꿈속에서 나는 그렇게 완전했다.
어디에서나 이방인일 것이고,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불완전한 모습일 테지만 그렇게 나는 유치할 만큼 순수하게 자유롭고 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내가 정말로 도피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꿈속의 나조차 그 모습을 닮기 시작한다. 그리고 꿈은 산산조각 난다. 소녀가 그 환상에 취해 또다시 떨어졌거든. 와장창.
어른은 아는 것이 많아 이유를 가지각색으로 대고 잘난 척하며 행동하지 않는다. 소녀는 달랐다. 좋다, 싫다를 바로바로 말하며 실행이 빠르다. 소녀보다 배는 몸도 크고 아는 것도 많은 그는 망가진 자신이 두렵고 그렇게 살아갈 세상이 무섭다. 그는 수술대 위에 누운 소녀 옆에서 술병을 들고 질질 짠다. 그 잘생긴 얼굴이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줄이야.
그가 꿈속에서 하나하나 죽인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냥 화살 한 방이면 될 걸 무슨 수십 개의 다리가 박힌 테이블처럼 촘촘히 부상을 입힐 건 또 뭐고, 그 단단한 절벽에서 추락시킬 건 또 뭐며, 왜 틀니까지 그렇게 말끔히 박살내는지. 그렇게 본인을 자멸시키고 싶었던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정신이 말짱한 어른은 생각이 많고 몸은 무거워 고통스럽다. 자신 대신 그렇게 등장인물 모두를 잔인하게도 없앴다.
영화에서는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 뭐, 어른이니 알아서 잘 살았겠지.
남자는 꿈에서 치유받았다. 본인을 닮은 무법자는 결국 그 절대의 적과 싸워서 이겼다. 다리를 다쳐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앞둔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지만 언제는 삶이 예상대로 흘러간 적 있나. 어른은 그래서 꾸물거림이 긴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변수가 무섭고 그 앞의 나는 너무나 약하다는 걸 사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긴 꿈을 꾸며 회복하고 있던 것 아닐까. 단 한 가지도 말이 되는 것이 없는 무의미의 반복이었으나, 그것이 나를 살고 다시 일어나 싸우게 했다. 그러면 된 거잖아. 꿈을 꾸는 것도, 깨어나 생각하고 먹고 걷고 움직이는 것도 나 자신이다. 죽지 않았으면 된 것이다.
비록 절망뿐일지라도. 아직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정신만은 말짱해 이 모든 걸 관망하고 복기하고 있잖아. 삶을 멈추지 말라는 목소리다.
'흉터가 남지 않게' 얼굴과 몸을 변형시켜 주는 성형외과, '상담기록이 남지 않는' 정신과가 즐비한 건물들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다른 걸 보려고 했었다. 예매 어플로 들어갔다가, 한 줄 소개만 대충 보고 이걸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퇴근하고 나니 그게 무슨 내용의 소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났고 너무 졸렸다. 아이, 스턴트맨, 무성영화 같은 단어만 떠올랐다. 보다 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더 폴, 의 ㅍ이 P인지 F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발작하듯 커튼을 뜯고 침대를 부술 것처럼 난동을 피운 후 소녀는 그를 보러 가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말한다. 로이는 쉬어야 한다고. 글쎄, 그는 늘 쉬고 있었다. 움직이질 못해 하루종일 누워 있고 볼일을 보는 것조차 누운 채였는데 뭘 더 쉰단 말인가. 의아했다.
그는 통증 때문에 편안히 잠들지 못한 대신 본인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다 비껴간 인물들과 대낮의 단꿈을 꿨다. 환상 속에서도, 그가 갖지 못한 것과 잃은 것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되지 않나. 그렇게 추측했다.
흔적이 남지 않는 것과 쉬는 것. 나는, 우리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쉬어야 하는 건지 생각했다. 원했으나 도달하지 못한 것, 바랐으나 갖지 못한 것. 그 무엇의 방해도 없는 꿈을 꾸는 것. 도피가 나쁜 것만일까 궁금해졌다. 지겹더라도 우리는 결국 뚜벅뚜벅 걸어 나가거나 교류하고 몸을 움직이며 섞여 살아야 하니까. 그 안에서의 차등과 우열에 끊임없이 스트레스받고 고군분투하는 게 삶이잖아. 죽어서 끝낼 게 아니라면 절대적으로 쉬어야 한다. 쉽지 않다. 이음새와 흉터도 없어야 하며 온갖 흔적을 나조차도 모른 체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 미쳐 버리기 딱 좋은 거 아닌가.
미치지 않을 정도의 꿈을 꾸며 잠들고 싶다. 아주 달콤한 휴식 같은. 근데 그 꿈을 꾸는 나조차도 멀쩡해야 한다니. 쉽지 않은데?
삶과 환상 모두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것일지도 모르지. 둘은 절대적으로 상호작용하니까. 어떤 꿈이 이 현실의 나를 살게 하고 일어나게 할 것인가. 도피일지라도, 도피이면 어때. 결국은 살아갈 텐데. 생이 던져대는 무한한 변수와 무질서를 뚫어야 하는 나를 위해 그 정도의 환상은 괜찮은 거 아닐까.
사람들의 오디어스는 무엇이고, 그들의 무법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 각각의 무법자는 어떻게 달릴지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