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야 할 닭모가지의 개수
우행록 : 어리석은 자의 기록. 2016
1. 왓챠 구독 중 / 체감 1시간 30분
(1500원 내외로 구매 가능 / 2시간)
2. 재관람 의향 : 이제 충분
3. 추천 : 무료하신 누구에게나
4. 동행 : 함께 봐도 괜찮을 것 같다
5. 같이 봅시다. 어두울 때 보세요.
플라톤은 친절하라고 말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힘든 싸움 중이니 친절하라고 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지하철 자리에 앉으려 코트 자락을 정리하던 찰나에 좌석에 끼어든 당신 말이야. 모두가 숨 막히게 붙어있는 와중에 어떻게든 휴대폰 잡은 손을 사수해 공간을 더 차지하는 당신들. 보고 있나?
친절. 웃으며 미소만 건네고 착한 말만 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두가 난투 중이니 알아서 참으란 뜻이다. 수틀리면.. 어? 수틀리면 말이야.
눈치 좀 챙기란 뜻이다. 칵, 그 뒤통수를 갈겨 휴대폰을 개찰구까지 날려 버리기 전에. 다리라도 걸어서 그 가로챈 좌석 앞에서 얼굴을 옆 자리에 처박은 채 엎어지게 하기 전에.
주인공은 자리를 양보하라는 나이 든 사내의 말에 좌석에서 일어난 후, 다리를 절뚝이다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넘어진다. 이후 카메라는 버스에서 내린 그가 점점 멀쩡한 걸음걸이로 길을 가는 모습을 잡는다.
그는 남의 명함을 소중히 받아 예의를 지키며, 남이 버린 꽁초도 본인의 담뱃갑에 도로 주워 넣는다. 수감된 여동생 대신 그녀가 낳은 아이의 안부를 확인하러 병원으로 향한다. 싸가지 없는 직장 상사와 동료의 언행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무례하지 않고 대놓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결말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 비록 삼류 주간지지만, 어쨌든 기자이며 예의 바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하는 무식한 사회관념에 동의하지 않으며, 암묵적인 서열질의 피곤함에서 물러나 조용히 그 광경을 비웃는 주인공.
나는 영화를 따라가며 그에게 이입하고 있었다. 화병을 내려쳐 카페 주인을 살해한 후 그녀 전남자친구의 꽁초를 가게의 재떨이에 놔둔 시점까지도, 그를 정의의 사도나 심판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가 찾아간 병원의 갓난아이가 사실은 정말로 그의 여동생과 그의 사이에서 난 아이였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2년 전쯤 영화를 봤을 때는, 결말이 모든 걸 다 망쳤다고 생각했다. 뭐야, 저랬던 거였어? 장난하나. 진짜.. 자기 애라서 그랬던 거야? 단지 피붙이라 그랬던 거냐고. 그냥 여동생을 지키고 싶었지만 실패한 오빠 정도로 했으면 됐잖아.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본 영화의 이 결말, 사실은 시작인 그 설정을 이제는 납득한다. 작중에서 감자 줄기처럼 엮여 있던 많은 이들이 죽었다. 카페 여주인의 전남자친구는 죽지 않았으나, 이 서사의 외부인으로 남지 못하고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이다. 의문점은 왜 주인공이 처음으로 취재한 대상인 타코우의 친구는 왜 죽이지 않았나, 극 중에서 죽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는 타코우와 합심해 여자를 농락한 후 그녀의 슬픔까지도 비웃었으나 똑같이 위선적인 그 친구의 죽음에는 오열한다. 너무 우스운 인간이라 내버려 둔 걸까? 주인공이 정말 정의 또는 뭐 그런 관념적인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면, 그 역시 끝이 나빴어야 앞뒤가 맞다.
극 중의 모든 사건은 개인적이며 감정적이다. 불우한 가정에서 났으나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저 그런 환경 출신이나 한계선 너머의 사회와 삶으로 편승하기 위해, 본인의 욕망을 착실히 따라가는, 잘생기고 키 큰 누군가에 대한 연정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마다할 필요 없었으나 더 가지고 놀기엔 취향이 아니라서, 사랑 또는 애정이라 생각했던 것이 애초에 그와 나 사이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이 아파서, 그와 그녀와 그 사이의 아이까지도 증오스러워서. 친딸이었으나 욕정을 느껴서.
어느 것도 사회의 규범과는 맞지 않는다. 제한되지 않은 욕망들이 사람들 사이의 또 다른 개인사와 부딪혀 법으로 심판될 사건들로 이끌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모르기 힘들 소설. 양파의 왕따 일기, 그리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각각 2001년과 1987년에 출판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2010년 작이다. 성별과 국가와 시대가 미묘하게 다르지만 궤는 같다고 느낀다. 굳이 열거한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서열을 나누어 그 우위의 인간이 하위의 인간을 부리고, 무시하고, 착취하는 양상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겠지.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의 SNS와 많은 생업의 현장에서.
시험에서 빵점을 맞는 게 쉬울까? 오히려 제일 어려울걸. 정답을 죄다 피해야만 완벽한 0점을 맞을 수 있다. 아예 운이 따라 주어서 고른 모든 것이 오답이거나.
주인공은 정답을 알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무례한 행동을 골라냈다. 오답은 마음에 담았다. 몰라서 그리 행동한 게 아니었다. 그는 영화가 끝날 때쯤에 임산부에게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한다. 그리고 그는 여동생을 임신시킨 전적이 있지.
어떻게 인간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제지받지 않은 행동 양상은 사회 속에서 사연을 입고 범죄가 되었다. 감정은 잘 써야 하는 흉기이며, 원한은 가장 강한 칼날이다. 분노를 모르는 게 아니다. 당신과 나의 사연과 이유가 개인적인 만큼, 날이 향할 곳도 마구잡이인 것이다. 깊이와 방향 중 그 어느 것도 짐작할 수 없다.
서열을 지어 약자를 착취하는 이 게임을 감히 종결시키려 칼을 들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역시 한 마리의 닭에 지나지 않았다. 눈을 쪼고 날아들어 목을 물었지만 그뿐이다. 닭이 뭘 할 수 있겠어. 사이클은 끝나지 않고 그나마의 징벌이 싸움을 잠시 휴전시킨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연들이 감형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세상은 거대한 닭장이다. 닭들이 모인 좁은 투계장이다. 인간적인 만큼 짐승을 닮았다. 나는 영화의 말미에 주인공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원한은 원한이며, 벌은 벌이다. 안타까운 일이나마 그의 여동생과 그 모두 형을 살겠지. 분노에, 분노를 뛰어넘은 행동들에 논리와 당위성이 존재하는가? 모두 벌 받아야 마땅하다. 정말 끝날 수는 없는 지긋지긋한 게임인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야겠다. 모두 힘든 싸움 중이니까. 정말로.
대가가 있기에 그걸 인지하고 다들 참는 것일 뿐, 몰라서들 무례하고 우악스럽게 굴지 않는 것이니까.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하고 싶어서 했다면, 나 역시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참고 있을 뿐이다.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이 드글드글한 분노와 촘촘한 서사는 누구에게나 있음을.
존중이 별 건가? 그것만으로도 이 질서는 한층 부드러워질 것이다. 모두가 날 선 상태라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만으로.
무서워서 이번엔 대낮 카페에 나가서 봤었다.
근데.. 15세 이상 관람가였어? 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