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이 없지만요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2
1. 5000원 / 2시간 안쪽
(유튜브에 무료로 올라와 있었는데 사라졌다)
2. 재관람 의향 : 이제는 더 안 봐도 됨
3. 추천 : 하지만 이미 너무 클래식인 영화.
4. 동행 : NO.
5. 화면이 예쁘고 둘의 이야기가 지루하고 또 뉴욕과 오드리 헵번이 예쁘다
낭비는 즐겁다.
둘은 젊었고, 딱히 생업이랄 게 없어서 시간이 많았다.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남아돌아 그들은 함께 즐거울 수 있었다.
반겨줄 사람도 없는 (사실 뉴욕에도 없는데) 남미로 떠나는 비행기를 버리고, 택시 문을 박차고 나와 비 오는 뉴욕의 뒷골목에서 키스한 후 둘은.. 행복했을까?
질문을 끝까지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아니.라고 떠올렸다.
폴 또는 프레드는 할리 또는 룰라 메이를 처음부터 사랑할 작정이었고 끝까지 그녀를 사랑했다.
사랑이 뭐라고 정의내릴 수 없지만 아무튼 그의 행적을 볼 때 그는 할리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폴은 할리가 0부터 100인 인물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가 그녀의 57부터 89까지만 안다 해도 13과 98 역시 기꺼이 끌어안을 사람이다. 적어도 극 중에서 할리를 보는 그의 모습은 늘 그랬다.
음. 그리고는.. 한계가 오겠지?
할리는 며칠을 폴과 즐겁게 데이트하며 보낸 후 또다시 부자를 찾아 나선다고 땡깡을 부리고 둘은 예쁜 6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웃기지도 않은 싸움을 요란스럽게도 하다가 -그녀는 감정이 격해지면 고양이를 집어던지고 유리 향수병이 놓인 화장대를 뒤집어엎고 책장을 밀어뜨린다. 멈추지 못하고 마시는 경향이 있으며 술을 즐긴다- 아침이 오면 누군가 먼저 사과할 것이다.
나머지 날들은 이런 패턴을 무한히 변주시킨 형태 아닐까. 달라지는 것은 계절과 그들의 옷차림뿐.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서로를 떠나거나 죽을 때까지 붙어있고 싶어 하다가.. 결국은 헤어질 것이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원래 연애는 몇 번을 어떻게 거쳐도 하나의 종착지만 인정되는 다소 우습고 귀여운 사건의 묶음 아닌가? 헤어지는 게 뭐 어때. 어차피 한 개의 결혼 빼면 다 '망한 게임'인데.
행복.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보통 뽀뽀하는 장면으로 끝나면 해피엔딩인걸. 근데 예전에도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할리는 어딘가로 들어가 비에 다 젖은 트렌치코트가 다 마를 때쯤엔 또 떠났거나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 같았거든. 바보는 폴뿐이다. 아니, 한 시간 반을 본 나도 알겠는 결말을 왜 폴 당신은 모르죠? 무슨 고백에 되도 않는 편지 낭독이야.
하긴, 그는 갑부를 꼬셔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번 교도소에 면회 도장을 찍는 할리를 정말로 따라갔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님을 착실히 보여주긴 했다.
둘이 함께 외출해 무용수가 드레스를 벗는 바에서 시간을 보낸 날. 무슨 신혼부부처럼 비슷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함께집으로 가는 층계를 오른 후 십 초쯤 지나, 둘은 차례로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날 밤에는 할리의 선공, 그리고 그다음 날은 폴. 아마 그 밤이 처음으로 서로의 가면을 벗겨 버린 때 아닐까. 그전까지 그들은 얼굴을 반 가린 가면을 쓴 채 신나게 춤을 췄다. 그리고 빙빙 도는 걸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을 잔뜩 구겨 던진다. 그래, 공격도 감정이 남아 있을 때나 하는 일이지. 그건 정말 사랑싸움이었구나? 양상은 그랬다. 사랑은 한쪽만 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지금의 다이소 같은 25센트-50센트 가게가 존재하는 시대에 남자와 한 번 잘 때마다 50달러씩 받는 여자, 부자 유부녀에게 '후원'을 받아 가끔 글을 쓰는 작가. 그들은 구태여 서로에게 각자의 처지를 일깨워 준다.
할리는 그렇게 번 돈을 저금하겠다고 하지만 지출이 수입보다 컸고, 폴은 주제에 꿈도 못 꿀 화려한 가구와 정장들로 채워진 -그녀가 채워주고 세를 내주는 - 아파트에 산다. 둘은 무일푼이나 다름없지만 타고난 외모들이 훌륭한 덕에 먹고산다. 할리에게 선빵을 맞은 후 다음 날, 피해자인 폴이 먼저 사과를 한다. 그리고 화려한 도시 뉴욕을 자기들끼리만 재밌는 장난을 치며 누빈다.
연애의 양상 중 하나는 세상 쓸데없는 짓들을 당사자들끼리는 매우 즐거워하며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최고급 보석상에 들러 과자 사은품으로 들어 있던 반지에 이니셜을 새겨 달라는 의뢰를 하고, 도둑질을 하고, 도서관에서 떠들며 낄낄거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 정말 연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 할리는 애진작에 사라져 있다. 폴은 정신을 못 차린 채 그전날 가게에서 훔쳐온 가면을 쓰고 있다가 본인의 유부녀 후원자를 마주친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말한다. 그만하자고, 여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일이라고. 그의 고용주는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그 역시 굴하지 않는다.
참으로 로맨틱한 남자인 폴은 혼자만의 불타는 사랑만을 쥔 채 유부녀 스폰서와의 관계와 더불어 애초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던 집과 물건들을 뒤로하고 할리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남미 갑부를 꼬셔 보겠다는 꿈도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있던 할리에게 분노한다. 어쩌면 그조차도 사랑인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며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할리를 잡아세운 폴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소리질러 고백한다. 그래, 또 한다. 그 조용한 도서관에서. 아이고. 역시나 놀랍지도 않게 시치미를 떼고 부자가 어쩌니 저쩌니 떠드는 360도 돈 제정신의 할리에게 폴은 '파우더 룸' 값을 지불한다. 술을 마셔야만 취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전날 할리는 감정에 취했다. 파티와 화려한 옷과 보석과 도둑질 같은 일거리에서 오는 흥분을 사랑하는 여자. '서로 안 해 본 일 해 보기' 같은 꿀잼 이벤트를 그녀가 사랑하지 않았을 리가. 그녀는 정말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그게 사랑이라고? 폴에 대한?
글쎄. 그녀는 그냥 그 즐거움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치솟아 정점을 찍은 감정이 사그라든 새벽에, 할리는 폴 옆에서 눈을 떠 부자 남편을 만나 돈 걱정 없이 사는 삶에 대한 목표를 다시 상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만난 건 고작 며칠이고 그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돈과 부자를 쫓아서, 그러면서도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을 잊지 못하지만 실질적인 행동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도 몰래 지겨워하면서.
그녀가 '폴'에게 돌아 있었다면 그건 사랑일 수 있지. 폴이자 프레드.. 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사실 둘은 거기서 끝났어야 했어. 뉴욕의 도서관에서 그가 그녀에게 지폐를 준 순간에. 너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냥 콜걸 취급한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화난 폴이 화면에 잡히고, 오드리 헵번의 상처받은 표정, 아름다운 얼굴과 목선이 원샷을 받는 시점에 이 이야기는 끝났어야 했다. 그게 해피엔딩이다.
볼 장 다 본 거 아닌가. 더 볼 장이 어딨어. 잔뜩 즐거웠고 잔뜩 슬펐잖아. 뭘 더 해. 더 하려 해도 꺼내 쓸 서사가 없어. 한쪽은 인생의 절반 이상이 다 베일에 가려진 존재이며 언제든 다른 곳으로 가버릴 준비에 열심인데 뭘 더 하나. 이거 러브스토리 아냐? 혼자만 결말을 채워 넣으면 안 되잖아. 그건 그냥 짝사랑 일기라고.
내내 폴이 좀 더 괜찮은 여자에게 반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화면에 나오는 할리가 너무 예뻤다. 사실은 오드리 헵번이 아름다운 거지만 그냥 할리가 예쁜 걸로 한다. 예쁘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해. 모든 장면에서 빛이 난다. 물론 반짝거리는 장신구를 단 장면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아니. 그 눈이 너무 빛나는 걸 어떡해. 펴진 목선과 어깨가 너무 약하고 날쌔 보이는 걸 어떡해. 그런데 얇은 입매는 너무 단정해 보이는 걸 어떡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는 아무런 저항을 못 하겠는 걸 어떡해. 정말 어떻게 이렇게 앞으로도 안 길들여질 예쁜 야생동물 같은 배역에 어울리는 외양일 수가 있지.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렇게 미치지 않았겠지. 반해서 돌아버리지 않았겠지. 그렇게 이 이야기는 탄생할 수조차 없었겠지. 이래서 남의 연애는 재미있다. 타인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주고받으며 둘은 잔뜩 흥분하고 가라앉았다가 위로받고 다시 감정 속에서 헤엄치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추락한다. 왜 저러나 싶은데 본인들은 그 굴레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 흥미롭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는 나 역시 그러고 있다.
몇 년 전에 딴짓을 하며 봤었고 한 번씩 생각했다. '그 장면'의 부엌 싱크대가 되고 싶다고.
둘이 한바탕 싸운 그다음 날 아침 할리는 부엌에서 폴에게 '당신이 돈이 많았으면 당장 결혼했을 텐데.'라고 생긋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폴에게 묻는다. 당신 역시 그랬을 것이냐고. 그는 동의한다. 그랬을 것이라고. 나는 이 장면이 좋았다.
사실 그 때는 오드리 헵번을 보기 위해 틀었던 터라 그 대화가 무슨 맥락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이렇게 답 없는 서로의 사연은 반쯤 눈감은 채 환장의 잡기놀이를 하는 중이라는 건 몰랐다. 그 와중에도 그 대사는 기억에 남았다. 종종 떠올라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나는 그건 정말 로맨틱한 고백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아니다. 할리는 정말로 돈을 사랑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어린 날의 본인과 함께한 이전 삶의 유일한 흔적인 동생 프레드와 돈 말고 그녀의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그녀가 '돈이 많았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인다. 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이 아니다. 그냥 별개의 주제를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녀는 돈이 삶의 최우선인 사람이다. 또한 그 돈을 위해 부자 남자를 꼬시는 방법을 택해 살아간다. 안 로맨틱하다. 할리는 즐거움과 반짝거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룰라 메이이던 시절의 본인과 그 남동생을 제외하고는.
할리 역시 폴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행동력과 뚝심이 가끔 부족했다. 본인은 스스로가 사랑을 속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부자를 원한다는 사실 역시 극 중에서 질리도록 말한다.
그렇게나 잘 알고 있다면, 폴에게 택시에서 남미의 부자 50인 목록을 뽑아 달라고 할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찾고 폴을 택시에서 내쫓아야 했다. 차라리 모르기라도 했다면 나중에 인지부조화는 안 오잖아. 행복하게 데이트하고 하룻밤을 보낸 그다음 날 다시 폴을 떠나 버린 것처럼.
그녀는 그날 남미행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그래야 모두가 결국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뉴욕 도서관에서의 눈꼴시린 민폐 뒤에 그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다시 본 이 영화는 사실 상당히 지루했다. 남녀 주인공의 설정 자체가 줄거리를 따라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장벽이 됐고 왜 오드리 헵번이 캐릭터가 본인의 성격과 가장 달라서 힘들었다고 언급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주인공인 할리에게 이입하기 힘들었고 폴만 불쌍했다. 하지만 정말 왜들 저러니, 싶을 때쯤엔 화면에 잡힌 그 둘과 60년 전의 뉴욕이 참 예뻐서 끌 수 없었다. 할리 고라이틀리가 그렇게 아름다운데 도무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더라고. 폴이 꽤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울 뻔했으나.. 뭐.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으니, 뭐.
그러니 괜찮을지도.
비록 내가 본 그들은 절대 함께 행복할 수 없지만.
한 사람만을 좋아하겠다는 서약 앞에 서기까지의 사건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없던 기억과 꺼내보지 못할 추억이 되는 연애들. 어차피 하나만 남고 망하는 게임이라면, 결론지어지지 못해 행방이 다 흩뜨려질 그 시간의 조각들의 주인공이 될 사람 하나쯤 그렇게 선택한들 어떤가. 자승자박이며 그 장면의 갈무리조차도 온전히 본인만의 몫이 될 텐데.
후에, 폴은 할리를 진하게 사랑했던 만큼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했을 것이다. 아마 할리는 그 누구도 그렇게 사랑할 수 없었겠지. 다만 뭐 생각은 할 수도 있겠다.
아, 그랬던 사람이 있었다, 즐거웠네, 하고서.
그리고는 아마 부자 남편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본인이 갈망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폴을 한 번 더 떠올리지 않을까. 이미 늦었겠지만.
+
오드리 헵번과 조지 페퍼드는 한 살 차이가 났다. 1929년생, 1928년생. 아름다운 외모의 그들은 각각 93년, 94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1962년 개봉인 이 영화에 얼굴을 내비친 많은 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의 최선을 고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최선의 기준은 가끔만 나에게 있다. 그 몇 안 되는 선택들을 자각하며 지내야겠다고 뜬금없이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