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_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관문, 북구의 베니스로 불리는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감탄하며 풍경에 넋을 놓고 걷는 것도 잠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주문 같은 한마디가 들려온다.
엄마, 다리 아파. 안아줘.
아, 그렇지. 나에게는 까다로운 여행 파트너가 있음을 잠시 깜빡했던 것이다. 그건 바로 6살짜리 딸아이였다.
넵스키 5번지를 찾아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역사의 도시에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18세기 초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는 바다와 연결된 이 지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도를 옮기기 위해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보다 북쪽에 있어 춥고 습지가 많은 지형에 도시를 건설하기란 쉽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는 9년 동안 추위와 과로에 죽어간 농노들이 무려 30만 명이라고 하니 이 도시를 ‘러시아 농노들의 백골 위에 지어진 도시’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도시는 18세기 초 건설되었던 그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 그 역사와 위용을 그대로 뽐내고 있었다. 길을 걷다 보면 러시아 고전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카잔 성당’이 있고, 운하를 따라 골목에 접어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피의 사원’이 딱 서있는 식이다. 눈을 들어 멀리 스카이라인을 보면 황금빛 돔 지붕을 한 ‘이삭 성당’이, 네바강가까지 왔다면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하는 에르미타쥐 궁전을 만날 수 있다.
그저 길만 따라 걸을 할 뿐인데도 바라보는 곳마다 놓칠 수 없는 여행 포인트가 되는 곳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더니 과연 그럴만했다.
두리번거리며 감탄하며 풍경에 넋을 놓고 걷던 것도 잠시. 어서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 아이가 칭얼댔다. 아이를 달래며 숙소의 주소를 다시 확인해보니 넵스키 5번지. 현재 위치는 100몇 번지. 대로의 반이나 걸어왔는데 숙소는 아직도 멀기만 했다.
아이에게 조금만, 조금만 하며 아이스크림도 사주며 쉬엄쉬엄 갔지만 애초부터 아이가 5킬로미터를 걸어가리라고 기대한 건 내 잘못이었다. 할 수 없었다. 아이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도 가장 유럽 같은 곳, 거리 곳곳에 역사와 문화가 18세기 이후 그대로 살아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떤 여행자에게는 이렇게 기억되겠지만 2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아이를 안고 걸었던 나에게 이곳은 고행의 도시. 어쩌면 그 순간 도시를 건설했던 농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너무 오버인가.
잠 못 드는 밤 해는 지지 않고
6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밤 12시가 넘어야 겨우 해가 지려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새벽 3시면 해가 뜬다. 밤은 고작 3시간도 되지 않고 그 밤마저 깜깜한 것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빛으로 밖이 훤하다.
말로만 듣던 백야였다.
때마침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졸업 시즌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졸업생의 날’을 정해 축제를 한다고 하는데 한창나이의 10대 청소년들의 졸업 축제이니 도시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시끌시끌하다고 한다.
우리가 묵었던 날은 축제 전 날. 아직 축제는 시작도 안 했는데 궁전 광장과 네바 강가에서는 축제를 위한 리허설이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내일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성미 급한 아이들은 벌써부터 거리에 쏟아져 나와 몰려다니고 있었다.
나도 마음은 졸업을 앞둔 10대 마냥 들떠서 거리에서 파는 맥주 한 컵 사들고 밤이 깊도록 훤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헤매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취침 시간이 꼭 정해져 있는 여행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 그래도 오늘만큼은 한 손에는 맥주 컵을 들고,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걸어본다. 아이도 졸리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환한 바깥 풍경에 조금 어리둥절한 채 두리번거린다. 아이는 이미 한참 전에 자야 할 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잘 모를 것이다. 이렇게 환하고 사람이 많고 분위기가 들떠 있는데 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네바강변에 서성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탄성을 터뜨린다. 다리가 열리고 있었다. 네바 강의 13개의 다리가 시간에 맞춰 하나씩 열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의 하이라이트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자 도시의 짧은 밤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더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이쯤에서 인내심이 바닥난 여행 친구와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야. 곧 해가 뜨지만 아직 밤이야.
눕자마자 잠이 든 아이 너머 창으로 불꽃놀이가 솟아오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 여름밤.
여행을 바랐던 우리에게 고단함이 더 컸던 그날 밤.
거리엔 해가 곧 떠오를세라 밤이 고픈 청춘들의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