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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작가 Sep 18. 2020

다시는 방콕에 안 갈래

아직은 어린 나이, 12살

그새 손톱이 자라 매니큐어 끝에 새 손톱이 초승달처럼 올라왔다. 

머리카락에 땋았던 색실도 느슨해져 손가락 한 마디쯤 내려왔다. 

샌들 자국이 선명한 발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까맣게 되었다. 

100밧을 주고 사서 내내 잘 입고 다녔던 코끼리 바지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아이의 얼굴엔 주근깨가 올라왔고 모기에 물린 팔과 다리는 긁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헤나로 그렸던 손목의 코끼리는 이제 희미하게 남아서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리 더워도 절대 묶지 않았던 머리와 땀에 절어 뭉칠까 봐 앞머리를 신경 쓰던 것도 이제 끝이다.


“이번 여행 어땠어?”


우리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기다리며 호텔 로비에 앉아 있었다. 

이미 체크아웃을 했고 한국말을 잘하는 프런트 직원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여행이 진짜로 끝나기 직전이었다.


“좋았어.”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걸로는 엄마의 성에 차지 않는다.


“뭐가 좋았는데? 자세히 좀 말해봐.”


아이가 작게 한숨을 쉰다. 뭐라고 해야 엄마가 만족할 것인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고 싶은 거 많이 산 거랑, 수영 많이 한 거 그런 거 좋았어.”

“그래? 더워서 힘들지는 않았어?”

“아, 맞아. 더운 건 좀 힘들었어.”


좀 친절하게 조곤조곤 여행에 대해서 좀 얘기해주면 좋으련만 아이는 굳이 여행에 대한 감상을 말하라고 하는 엄마가 귀찮거나 나를 만족하게 할 만큼 자세히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좋았다는데 어떻게 뭘 더 얘기하라는 거냐는 표정이다.


이번 여행에서 사춘기에 막 접어드는 소녀가 된 아이를 만날 때가 있었다. 

언제나 내 손을 놓치면 큰일 날 것 같았던 아이였는데 때로는 엄마를 놓고 저 앞에 가기도 했다. 

혼자 갈 만큼 컸다는 걸 느낄 때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서운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얼른 커라, 빨리 커서 엄마한테서 떨어져라, 하던 나였는데도 

내 손을 놓은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건 많이 낯설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미주알고주알 그날 있었던 얘기를 엄마에게 떠드는 대신 친구와 비밀 얘기를 나누고, 

예뻐지고 싶다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방문을 닫아버릴 아이를 생각하면 

벌써 서운한 마음이 든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 너무 멋없는 엄마가 되는 거겠지.


“헉! 엄마! 저거 뭐야!”


멋진 엄마가 되겠노라 혼자 다짐을 하는데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 팔을 잡았다. 

아이가 가리키는 건 로비 바깥으로 보이는 작은 정원이었다. 


“왜! 왜? 뭔데?”


뭔지도 모르고 깜짝 놀라서 아이를 끌어안고 보니 아이가 보고 놀란 건 쥐다.

 정원이랄 것도 없는 작은 풀밭에 돌아다니는 쥐, 아니 쥐들. 

물론 우린 실내에 있었지만 등 뒤로 쥐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아마 이런 쥐는 처음 보았을 윤은 쥐가 자기 발밑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질색을 했다. 


“으악! 너무 싫어! 저기 어떻게 나가?”


나도 물론 쥐를 보고 소름 돋을 만큼 싫었지만 나까지 이 소란에 동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다고, 쥐가 우리한테 오지는 않을 거라고, 택시가 오면 잽싸게 타면 된다고 아이를 다독였다. 


“엄마, 나 무서워서 못 나가!”


그 사이 택시가 도착하고 호텔 직원이 짐을 차에 실어주는 동안에도 아이는 로비에서 나오지 못했다. 

울기 직전의 표정을 한 윤. 아직은 쥐가 무서운 12살이었다.


“엄마가 여기 막고 있을게. 빨리 타.”


정원 쪽을 막는 시늉을 하고 손짓하자 아이가 로비 밖 택시로 뛰어와 잽싸게 올라탔다. 


“쥐가 있는지 몰랐어. 으악, 너무 싫어!”

“그래도 마지막 날 본 게 다행이다. 엄마도 쥐는 싫다!”


택시 안에서 호들갑을 떨며 윤이 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다 큰 척하더니 그깟 쥐에 호들갑이나 떨고.
너 아직 엄마가 필요한 꼬맹이로구나. 


그래서 좀 다행이다. 아직은 내가 너를 안아줄 수 있으니까.


“다시는 방콕 안 갈래.”


비록 우리의 여행이 이런 다짐으로 끝나버릴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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