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돈 번다는 나이 마흔. 나는 15년 가까이 해오던 회사원 생활을 청산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그 시간 중의 반은 언제 회사를 나갈 수 있을까 불평하며 꾸역꾸역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것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남편의 유학 결정에 못 이기는 척 미국에 와 살고 있다. 흔히 말하는 퇴사준비 같은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대. 책. 없. 는. 퇴사였다.
대학 때 나는 경제와 경영을 전공했고, 주변의 많은 아이들이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번의 고배를 마시던 그때 세무사라는 비슷한 과목으로 이루어진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더 이상 공부는 하기 싫었기에 바로 증권회사에 신입 공채로 취직했다. 입사하면서 내가 나에게 했던 약속은 40세에 연봉 1억을 받는 것이었다. 그 후 퇴사해 내 사업을 하는 것, 그것이 어설프게 설정한 나의 인생 목표였다. 40세가 다되어 퇴사했고, 연봉도 그 정도 받았으니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나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그런데, 퇴사 후 멋지게 내 사업을 꾸리겠다는 그 목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너무 막연했던 그 목표가 더 이상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20대를 돌이켜 보면, 취업, 그리고 일하고 있는 분야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자기 계발의 시간이었다.
- 점수 맞춰서 간 대학, 생각지도 못했던 경제학 전공.
- 회계사에서 세무사로 방향 전환. 막연하게 좋을 것이라 기대했던 금융회사.
음악과 책을 좋아하고 PD가 되고 싶다던 어리숙한 고등학생의 얕았던 꿈은 아마도..
대학 입학 때부터 이미 교묘하게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렵사리 공부한 자격시험에 패스했다는 자신감과 금융회사 직원이라는 타이틀은 ‘너는 꽤 잘살고 있어’라고 나를 위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일도 열심히, 잘 해낸다.
나도 항상 중간 정도는 해냈던 것 같다.
그런데 크게 실수만 하지 않으면 무난히 가겠다는 자세로 10년 넘게 회사를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너무 큰 권태감에 빠지는 것이었다.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었다. 슬럼프는 단기적으로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극복할 수 있는 슬럼프가 아니었다. 같은 업종 내에서는 이직을 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이 조여왔다. 직종을 바꾸고 싶었다. 전문성이 강한 일이다 보니 회사 내에서 확장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다. 하나의 일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일이 재미가 없었다.
일이 재미가 없다면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를 좋게 한다든지, 돈을 모으는 재미에 빠져 있다던지 하는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나는 회사 생활의 절반 인상은 윗사람, 즉 회사로부터의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우쭈쭈"에 신이 나서 일을 하다 보면 일이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아도 어느 순간 재밌어진다. 마치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진짜 공부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의 일은 인정해 줄 "스페셜리스트"가 없었다. 스페셜리스트로 구성된 팀에 " 제너럴리스트"가 팀장으로 와 있었다. 누가 얼마나 뛰어나고 잘하는지 위에서는 알 수 없다. 일은 다 비슷하게 하겠지 하는 전제하에 술자리에 얼마나 더 많이 참석을 하고, 얼마나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남들보다 더 일찍 자리에 와서 앉아 있느냐 하는 태도적인 부분이 회사로부터의 인정의 잣대로 변질된다. 이 현상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심해진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잉여인력은 넘쳐나고, 사회생활은 수능시험처럼 점수로 채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직장인 분들께 부끄러운 자기 합리화로 비칠지 모르겠다. 자기가 주체가 된 오너 마인드로 대기업을 다닌다는 것? 말은 참 그럴싸하고 좋지만, 어느 순간, 커다란 우주에서 지구라는 행성의 작은 모래알 정도의 존재감으로 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시점부터는 우주라는 존재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분명 작은 회사이거나 내 사업체라면 내 'Creativity'나 'Proactivity'가 곧 성공을 좌우할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에서, 그것도 주요 부서가 아닌, 돈을 벌어오지 않는 지원 부서에서는 열심히만 하면 중간은 간다. 아니, 사실 대충대충 일해도 중간은 간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남에게 되바라진 소리를 안 하고 조용히 회사를 다니니 아주 튀지는 않지만 열심히는 하는 애, 뭐 그냥 차장 정도까지는 승진시켜줄 만한 애 정도로 회사에서는 나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남들이 보면 번드르르한 직장에 높은 직급,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은 자격증. 그러나, 화려한 화장과 꾸밈, 겉으로 보이는 직급, 연봉은 내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 나는 몇 년을 화장한 좀비처럼 살았다. 아침 5시 반에 눈을 뜨고 곱게 화장을 하는 게 하루의 가장 큰 미션이었으며 머나먼 출근길 지옥철에서 듣고 싶은 음악을 맘껏 듣는 게 낙이고 점심시간 한 시간 전부터 초단위로 시계를 들여다 보고. 저녁 6시가 되면 팀장이 언제 집에 가는지 그 사람의 숨소리와 손동작 하나에도 민감해지는. 그런 평범한, 아니 현실의 삶은 루저에 가까운 직장인 말이다. 아니, 회사를 다닐 때는 그 삶이 전부였고 나였고, 나라는 존재는, 회사라는 직함과 껍데기를 벗기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빈껍데기만 남은 육신과 텅 비어버린 머리.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
이런 삶이 지속되다 보니 '돈을 많이 벌어서 노후를 행복하게 사는 것' 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미션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노후에 경제적 여유가 있으려면 현재의 행복을 조금 포기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자위했다. 물론 이런 목표의식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즐기고,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나도 그랬다. 틈틈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1년에 한두 번은 하고 싶은 여행을 하고, 맛집 탐방을 다니고, 사고 싶은 명품 가방도 가끔 샀다. 그러나 나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 회사'가 즐겁지 않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들이 너무나 짧고 회사가 그것들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질적, 경제적 여유를 위해 시간이 주는 자유를 포기하며 사는 삶이 싫으면서도, 발은 그저 차가운 겨울 출근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남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남편도 금융회사에서 자산운용을 하고 있는, '펀드 매니저' 였는데 그게 적성에 맞지 않는다 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싫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는 좀 달랐다. 문제의식을 빠르게 느끼고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미국 박사 유학 준비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웃었다. 그것도 자기의 전공분야인 금융이 아닌 사회학이다. "그래 머? 갈 수 있으면 준비해 봐. " 난 쉽게 수락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반신반의 하는 마음에, '혹시라도 가게 된다면 나는 회사를 그만둘 수 있어'라는 순수한 마음에 허락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그 후폭풍이, 나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회사를 그만둔 퇴사 결정의 주체성에 대해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할 말이 없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서서히 끓는 물에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영혼 없는 좀비'처럼 회사를 다니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변명과 합리화가 아주 길었던 이 사람, 그럼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질 시점이다.
Literally, 새로운 제2의 직업이 무엇인지 찾고 있다. 구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한테 맞는 진정한 의미를 가진 일이 무엇인지 탐색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중이다. 속시원히 그만둔 회사이지만 아직도 기존의 가치관에 좌우되는 욕망이 스멀스멀 가슴속을 치고 올라올 때마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닫고 통감하게 되었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 또한 생겼다.
또한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을,아니 솔직히 말하면 백수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 부모를 잘 만나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다. 인생의 대차대조표 상 가장 소득이 많아지기는 시기라는 불혹의 나이에 우리 부부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적인 여유가 굉장히 많으므로! 여기 있는 동안 미국 자동차 일주를 모두 마치는 것이 우리 부부의 목표이다. 지금까지 세 번의 로드트립을 마쳤는데 앞으로도 세 번 정도는 더 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대학 졸업 후, 아니 고등학교 졸업 후 영어를 접한 적이 없는 "영포자"인 내가,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을 외계인과의 대화처럼 생각했던 내가. 미국이라는 환경, 한인타운이 없는 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미국 오면 저절로 영어 잘하는 줄 알았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그렇다, 퇴사 후 그다지 발전한 것은 없다. 시간 여유가 많아져서 잡생각만 많아졌다. 다만, 얻은 것도 많다.
가진 것을 내려놓는 선택이 가져온 인생의 또 다른 경험과 행복을 공유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똑같이 살아가는 삶이, 내 인생과 경험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아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