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요나 Feb 22. 2019

나는 생산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비의 인간이 생산의 인간으로 가기 위한 발버둥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날 밤, 무언가를 생산하는 삶이 너무나 그리웠다. 쇼핑정보와 각종 마케팅 메일에, 스팸인 줄 알면서도 무조건 반사로 클릭하고 있는 나를 보며, 재미를 위한 여러 콘텐츠들을 낄낄대며 보느라 시간을 보내 버리는 내가 새삼 느껴지면서, 소모적인 삶에 대한 자조감마저 들었다. 적막과 고요함만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까만 밤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센티멘털리즘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생산과 소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이후로 이 생각에 대해 간간히 많은 물음표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산 Vs. 소비?

생산과 소비는 주로 경제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는데 정확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생산 : Production.  인간이 자연에 작용을 가하여 어떤 효용을 가진 재화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활동. 반대말은 소비.
소비 : Consumption. 사람이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재화를 소모하는 일. 일상생활을 위한 본래적 소비와 재생산을 위한 생산적 소비로 나뉨. Consume의 유의어로 spend, waste, use up, destroy 등이 있다.


구글링으로 찾아본 소비의 영어 표현을 보면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 Destroy까지 유의어라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비가 미덕이 된 역사가 그다지 길지는 않나 보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엔 내가 창출해 내는 부가가치는 바로 돈이며, 고로 나는 생산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비록 내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의 도구에 불과한 생산이었지언정, 나라는 '생산하는 사람'의 가치는 곧 나의 연봉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 아니랄까 연봉 1억 원을 20년 동안 받을 경우 나의 현재가치를 계산해 본 적도 있다.

그렇게 계산한 현재가치는 매년 임대료가 얼마씩 나오는 상가건물을 가지고 있는 임대업자의 부동산 가치와 다를 바가 없으며 나는" 걸어 다니는, 감가상각 되는 자산이다."라고 스스로를 정의 내렸다. 임대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저 자산가는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나는 몸뚱이 하나로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몸뚱이가 자산이니 투자를 많이 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주로 외모 치장이지만)를 앞세워 스스로에 대한 선물을 자기 위로적 성격으로 해주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사실 생산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소비적인 사람에 가까웠다. 필요도 없는 옷과 신발, 미용실, 피부관리. 들인 돈과 시간을 생각해 보면, 나의 경우 결코 투자는 아니었고(외모적으로 크게 업그레이드된 것은 없다) 오히려 비합리적 소비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투자란 그로 인한 효용과 가치가 창출되어야 목적에 맞다. 물론 쾌락추구가 인생의 목적이라면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졌다. 약간의 죄의식이 동반되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생산적인 사람일까? 과거의 내 잣대를 들이댄다면 나는 현재 1도 돈을 벌지 못하고 앞으로도 돈을 벌지 못한다 가정할 경우(잠재적 수입을 가정하는 것은 무리수이므로) 현재가치 0의 사람인 건가? 현재 주부로의 삶을 사는 지금의 나는 어떻게 가치를 매겨야 하나. 가사노동의 경제가치를 계산해서 나를 점수 매겨야 할까?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부가가치가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무엇이 생산이고, 무엇이 소비인가.

경제원론적 관점에서 시작한 이야기지만 사실 삶의 근본적인 방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비가 무조건 나쁘고 생산이 무조건 좋다는 것도 아니다.


집, 옷, 가방, 차, 여행, 외식 등. 돈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없다.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소비는 살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사회는 우리가 소비를 하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며 GDP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매번 강조한다. 그러나 소비의 성격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고 지출하면 지나고 봤을 때 불필요한 소비가 될 수 있다. 자기만족적인 소비, 남의 눈을 의식하는 소비, 많은 성격의 소비가 있겠지만 '내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지는 소비'인가에 대해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삶의 질이 높아지는 소비라면 필요한 소비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합리적인 감정적 소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재화나 서비스에 대한 소비만이 소비가 아니다. 우린 수많은 피드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처리하느라 뇌를 엄청나게 소비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을 필터링하느라 드는 시간과 수고를 생각해 보면 정보의 과다공급을 소비하느라 점점 뇌는 지쳐간다. 배움과 지적 욕구 충족으로만 보기엔 데이터 처리량이 너무 많다. 그 스쳐 지나가는 정보들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말이다.


사람에 대한 소비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시간과 노그리고 감정소비로까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되며, 잠시 친했다가도 금새 멀어지는, 스쳐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카카오톡에 저장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 중 1년 이상 연락을 안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이 많은 주변의 것들.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간에.

재화가 되었든, 정보가 되었든, 인적 네트워크가 되었든.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Things를 잘 필터링할 수 있는 시각을 갖아야,

시간과 돈의 노예 그리고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것의 노예가 되는 순간, 나 자신이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는 순간 나는 불필요한 소비만 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극적인 영어 표현으로 나 자신은 그저 destroy 되는 수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절, 그것들이 나를 얼마나 파괴해왔는지에 대해 무감했다. 지금은 그 '아무 생각 없음'이 나를 얼마나 학대해 온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몸만 치장하면, 스펙을 좀더 쌓으면, 연봉이 높아지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은 내 겉모습만 보고 나를 판단하므로, 겉모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허우대가 멀쩡하고 스펙이 빵빵하고 돈이 많으면 된 거라고 생각했다. 잘생긴 사람과 이쁜 사람, 키가 크고 몸매가 좋은 사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을 보며 그렇지 않은 나를 아쉬워했다. 내면과 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은 멀리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은 잘 만들어진 와인잔 같아요.
앞으로 맛있는 와인을 잘 채워 가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이말을 던진 사람은 날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기업연수에서 나에게 의무적으로 덕담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의미 없는 형식적인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나의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나를 간파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표정과 눈빛만, 얼굴만 봐도 그간의 그의 삶이 드러난다.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 가득한 얼굴이 되고, 수심 많은 사람은 수심 가득한 얼굴이 된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인상이 있기는 하지만, 생각과 마음 씀씀이가 그 사람의 표정을 조금씩 바꾸게 된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그리 이야기한 것도 나의 빈껍데기가 느껴져서일까.


이제는 유형의 콘텐츠뿐 아니라 무형의 콘텐츠로도 내가 가진 와인잔을 채우고 싶단 생각이 든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삶을 영위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나는 생산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산적인 삶을 살아내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내면에 쌓여

그것이 나를 생산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그런 삶을

기어코 살아내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의 신비를 살아낼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