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계절은 지금 어떤 계절일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사람의 생.
그 가운데 일 년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행운일까 생각해 본다.
가을은 사람을 차분하게 하고, 관조하게 만든다.
가을이 되면 아침저녁 쌀쌀한 날씨에 움츠러들었다가도 낮이면 더없이 따사롭게 어루만져 주는 햇살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온의 차이가 바로 황홀함을 안겨주는 단풍의 색채가 된다.
푸르름을 자랑하던 엽록소가 파괴되어 녹색 뒤에 숨어 있던 본연의 색이 나타나면 노란색으로, 안토시안이라는 화학물질이 생성되면 붉은색이나 갈색 계열로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마치 나비가 번데기에서 탈피해야 날개가 돋아나듯이, 알을 깨야만 새가 태어나듯이, 나뭇잎은 엽록소를 파괴해야만 가을의 찬란한 색채로 재탄생할 수 있다.
사람도 그런 게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색을 벗어나야 새로운 나의 색이 비로소 찬란하고 황홀하게 고유의 색으로 발현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도 나만의 색을 찾고 싶다. 나만의 색을 만나고 싶다. 나만의 가을로 물들고 싶다.
가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고, 명상가가 된다.
그래서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참 사춘기 시절, 나는 인간이란 무엇일까? 왜 사는 것일까? 같은 철학적 질문에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답을 알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종교에 답이 있을까 싶어 교회를 스스로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책을 읽을수록 세상은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았고, 점점 염세주의에 빠져들었다. 교회도 사람들에게 실망해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생각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차피 삶에는 정답이 없다.
어떤 것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모두 틀린 것도 없다.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다. 신을 믿는 자들조차 그러하다.
우리 모두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사랑이 구원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원 같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하는가?
전보다는 많이 사랑하고 있다. 점점 나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딸의 권유로 나의 강점을 알아보는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강점 1순위가 심미안이었다. 심미안은 아름다움과 탁월성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 자연에서부터 예술, 수학, 과학, 일상의 모든 경험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아름다움과 탁월함, 능숙함을 인식하고 감상하는 안목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하늘을 보면서도, 하늘의 구름에서도 길가의 나뭇잎을 보면서도 심지어 부는 바람조차도 아름답게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 면들이 이렇게 검사에 나오다니 신기하기도 했다.
이 가을 나는 다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변화하는 삶을 살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40년도 전에 고뇌했던 그 질문들 앞에 다시 섰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번 질문 역시 정답은 없다. 그 질문의 답 역시 나만이 할 수 있는 답이다.
가을을 향해 걷는 두 번째 걸음은 사색에 잠긴 철학자가 되어 걷는 걸음이다.
올가을 나는 자신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며,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즐겁게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고뇌하는, 조금 깊이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이 나를 보듬어주고 싶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를 알아주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었다.
하지만, 블로그를 만나고 글을 쓰면서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점들이 글을 쓰는 장점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이런 성향의 사람이었구나를 알아가는 것....
그래서 누구나 결국은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죽음 앞에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고 싶다.
이만하면 잘 살다 가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다가올 가을처럼 찬란하고, 아름답고, 황홀하게 그렇게 무르익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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