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조금씩 가을의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가을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늘 같은 듯, 다르게 서서히 스며든다.
햇살 따스한 양지쪽 나뭇잎들은 이미 울긋불긋 물들어 가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지만, 아직은 온통 매혹적인 가을은 아니다.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김현승 시인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또 하나의 시는 바로 그 유명한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다.
시몬, 낙엽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의 빛깔은 곱고 소리는 나직하다.
낙엽은 땅바닥에서 가냘픈 몸으로 뒹군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 질 무렵 낙엽은 애처롭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낙엽은 소리 죽여 울부짖는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을 밟을 때면 낙엽은 마치 영혼처럼 울며
날개짓 소리와 여인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여운 낙엽이 되리니
오라, 벌써 밤이 내리고 바람이 우리를 실어 가려니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아~ 가을 풍경 아래서 음미하는 이 가을 시들은 좋아도 너무너무 좋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는 시인이 되어 보고 싶다.
작년, 재작년에는 한 달에 한 번 시인이 되어 나름 시를 끄적여 봤었다.
하지만, 올해는 너무 이런저런 일들이 몰아닥쳐 시를 한 편도 쓰질 못했다.
한참 방황 끝에 한 편의 시를 탄생시켰던 그때처럼 올가을에도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싶다.
하지만, 저 두 편의 시를 읽고 나니 머리가 하얘져서 그 어떤 시도 쓸 수가 없다.
아름답고, 찬란하고, 황홀하고, 고혹적이며 매혹적인 가을....
이 가을을 나만의 시로 표현하고 싶다.
가을 세 걸음은 시인의 마음으로 보내는 가을이다.
매일 산책을 하며 메마른 시심을 일깨워 본다.
두 눈 가득, 폐부 깊숙이 가을의 색채를 머금어 본다.
이번 가을이 끝나기 전에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킬 수 있을까?
나는 시인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켜 본다.
성공할 수 있을까?
이번 글을 올릴 때 한 편의 시를 같이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시심을 잃었는지 도저히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아쉬운 대로 작년에 올렸던 가을 시로 대체해 본다.
아직 올가을은 끝나지 않았으니 이 가을 시인의 마음으로 한 편 시에 도전하기는 계속된다.
연초록 희망에서
불타는 열망으로
올올이 자신을 다 채운 뒤
아스라이 바스러지는 낙엽,
한줄기 바람에
살랑살랑 춤추며 내려와
소복소복 쌓이는 가을 끝자락.
바스락바스락
사락사락
발끝으로 낙엽의 노래를 듣는다.
어느새 바람이 차다.
성마른 나무의 앙상한 가지뒤로
가을이 저만치 멀어져 간다.
이 가을
비우지 못해 채울 수 없는
한 여인이
바람 끝에 떨어지는 낙엽을 줍는다.
그냥 보내기 차마 아쉬워
쓸쓸한 미련을 박제해 본다.
단풍처럼 고은 글 한 자락을
길어 올리고 싶다.
이 가을날에는....
<이 가을날에는> 2022년 11월에 쓴 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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