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토끼 Nov 04. 2023

가을 네 걸음

날마다 만나는 가로수들이 온통 알록달록 다채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서 있다.

보기만 해도 눈이 깊어지고, 마음이 일렁인다.

저마다 바쁘게 오고 가는 차들,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찬란한 색채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가로수....

그 나무 밑에는 곱게 채색된 나뭇잎들이 어지러이 떨어져 있다.


출근길 신호등을 기다리며 그 풍경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발이 살짝 땅에서 떨어져 한 1cm 정도 떠 있는,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잘 신경 쓰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부유라고 할까?

마치 자기부상열차가 된 그런 기분이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나는 늘 붕 떠있다.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라는 뜻이다.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 있는 나뭇잎들을 보면 왠지 포근하다.

그저 가을 풍경을 바라보는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

가을은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동안 살아내느라 급급해 자기 자신을 잊고, 잃고 사는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것들, 잊고 사는 것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낮 나무들마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찬란하게 빛나다 본연의 꾸밈없는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떨어진 낙엽마저 아름답다. 부스러지는 그 모습마저 숭고하다.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내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처럼 영롱하게 빛나본 적이 있느냐고, 당신의 모든 걸 미련 없이 불태워 본 적이 있느냐고....

그 깨달음을 알려 주느라 매년 그렇게 빨갛게 노랗게 갈색으로 주황색으로 우리를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미련한 나는 가을이 주는 교훈을 이 나이 먹고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가을처럼 살고 싶다. 가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침 산책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격이 내향적인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게 맘이 편하다.

그런데, 같은 시간대에 산책을 하다 보니 거의 매일 만나는 분이 계신다.

바로 공원을 관리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다.


70대쯤 되셨을까? 공원관리라고 쓰여 있는 조끼를 입고 검정 뿔테안경을 쓰신 채 낙엽이 덮인 산책로를 쓱싹쓱싹 경쾌하게 비질을 하고 지나가신다.

그런데 그분의 빗자루는 조금 특이하다. 일반 빗자루가 아니라 나뭇가지를 여러 개 묶어서 빗자루 대신 사용한다. 그 나뭇가지 빗자루로 좌우로 리듬감 있게 쓱쓱 싹싹 비질을 하신다.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쓱싹쓱싹 비질 소리가 들려온다. 그 아저씨였다. 하필 오솔길 중간에서 딱 마주쳤다. 

그분께서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며 지나가셨다.

나이도 어린?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주시다니....

뭔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 이후 산책길에서 마주치면 이제는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린다.


한 번은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려는데 지저분한 게 묻어 있어서 마침 주머니에 있던 몇 장 남지 않은 물티슈로 손이 닿는 부분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염된 곳이 꽤 많아서 물티슈 한두 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 아저씨가 지나가시며 "뭐가 묻었나요?" 물어보셨다.

"이게 잘 안 닦이네요~ 내일 물티슈 가져와서 좀 더 닦아야 할까 봐요" 하고 운동을 패스하고 내려왔다.


다음 날 그 운동기구를 봤더니 세상에 너무도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성급한 나무들은 벌써 나뭇잎을 다 떨구어 낸 채 하루하루 헐벗어지고 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우수수 낙엽이 흩날린다. 

한번 쓸어도 바람이 불면 다시 낙엽이 쌓일 테지만 오늘도 어느 공원에서는 나뭇가지로 된 빗자루로 쓱싹쓱싹 경쾌하게 묵묵히 낙엽을 쓸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모두 자신만의 느낌으로, 시선으로 이 가을을, 이 낙엽들을 바라보며 오직 한 번뿐인 올해의 마지막 가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요 며칠, 가을답지 않게 따스한 날이 연이어 계속되더니 봄인 줄 알고 철쭉꽃이 활짝 피었다.

그래서인지 아직 채 물들기도 전에 벌써 나뭇잎들이 말라비틀어져 다 떨어져 가고 있다.

아직 충만한 가을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올가을이 벌써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일까?

나는 아직 가을에 목이 마르다. 


◇◇◇



작가의 이전글 가을 세 걸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