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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토끼 Nov 18. 2023

가을 여섯 걸음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올해의 첫눈이다.

첫눈이 이토록 풍성해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일까?  펑펑 내리는 대신 바닥에 떨어지는 족족 녹아서 사라지는 첫눈이었다.


언젠가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와 했던 약속이 불쑥 떠올랐다.

10년 뒤 첫눈 오는 날 어디에서 만나자고....

그런 약속이 몇 번쯤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몽땅 사라져 버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이 지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 첫눈 같은 약속들이었다.


가을을 채 누리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번 가을은 어떤 가을이었을까?


평소보다 가을 분위기가 덜 무르익었던 가을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살펴보니 단풍나무에 단풍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예년이면 빨갛게 불타던 단풍 나뭇잎들이 아직도 초록을 떨궈내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일부분만 빨갛거나 노랗게 변했을 뿐 많은 나무들이 자신의 초록을 깨지 못한 채였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단풍나무도 자신의 가을이 빨갛게 불타오르기를 열망했을 거였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기를 바랐을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가을이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한계를 깨지 못한 채 초록으로 남아 있다.


<2023년 11월 단풍>

<2022년 11월 단풍>


작년 같은 때와 비교해 봐도 여실히 차이가 난다.

올해의 온도나 습도 일조량 등이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기 좋은 조건이 아니었던 것일까?

겨울이 되기 전에 이 단풍나무의 초록 잎들이 찬란하게 불타오를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시들어 가고 말 것인지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빨간 단풍이 사라진 낙엽은 온통 갈색으로 덮여 있다. 물기마저 사라져 금방 바스러질 듯 메마른 낙엽을 보니 마음이 툭 내려앉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따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앙상한 가지 위에 남아 있는 잎사귀 몇 개....

그 위로 걸려 있는 파란 하늘....

어디선가 작게 비행기 소리가 들려온다.

하얗게 빛나며 손톱만 한 비행기가 시리게 파란 하늘 위로 지나간다.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런 삶....

하지만, 현실은 15평 문구점에 묶여있다.

누구도 나를 묶어 놓은 적 없건만, 벗어나지 못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발밑에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낙엽이 왜 이렇게 쓸쓸하고 허허 로울까?

난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결국 이번 가을에는 한 편의 시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될 것만 같다.


휘잉 
부는 바람에 
눈이 시리다.

시린 하늘 
하얀 구름 아래 
맺힌 건,

가을을 보내는
내 미련 한 방울....

끝내 
깨치지 못한
초록 단풍잎 향한
붉은 마음 한자락....


- 어느 설익은 가을날 -

포기하는 순간 떠오르는 글귀를 기록해 보았다.

뭔가 어설프다. 이대로 초록 단풍잎처럼 미완의 시가 될지, 완성된 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단풍 들지 않은 단풍나무.

시간이 흐르면 붉은 단풍이 될까?

아니면, 이대로 시들어갈까?


2023년의 가을 풍경은 어떻게 마무리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첫눈이 스쳐 지나간 이 가을 끝자락이 물색없이 푸르러 마음이 시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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