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고작가. 뭔가 작정한 듯이 채원의 품을 파고드는 고작가의 장난에 채원은 완전히 얼어버렸다. 채원은 고작가의 눈에서 그의 눈빛을 보았다. 채원이 가장 어려워하고 당황해하는 그의 차갑고 단단한 눈빛. 고작가는 그런 채원이 재밌기만 하다.
"이채원. 넌, 나 못 이겨. 그때나 지금이나."
채원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린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 심장 박동 수다. 채원의 품에서 점점 얼굴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는 고작가. 채원은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고작가는 지금 멈출 생각이 없다. 채원은 눈을 질끈 감는다. 채원의 심장소리가 귓가를 더 크게 때리고 지나간다.
지금 이 집에는 여전히 둘뿐이다.
'쿵쾅 쿵쾅' 고막을 울리는 심장소리에 채원은 침을 꼴깍 삼킨다. 고작가와 눈을 마주 보고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눈빛만 주고받고 있다. 채원도 눈을 피하지 않는다. 고작가의 당당하고 차가운 눈빛에 매료된 채원은 이대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바라볼수록 빠져드는 고작가의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서도 그의 눈빛이 묻어난다.
"이채원,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그렇게 내 눈을 보는 거야?"
"그.. 그건.. .아 몰라~"
이불킥을 날리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채원은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방을 한 바퀴 휘감고 사라진다. 고작가가 오고 나서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예쁜 핑크빛 벚꽃이 휘날리는 봄 같다. 포근하고 향긋한 벚꽃이 바람을 타고 공기중에 떠다니다 채원의 코 끝에도 고작가의 수염 끝에도 살며시 내려앉는다. 이건 분명 핑크빛 사랑의 향기다.
사랑의 향기를 타고 고작가의 털도 휘날리기 시작했다. 하룻밤 잤을 뿐인데 눈으로도 보이는 털 털 털!
부유하는 먼지가 아니라 부유하는 털이다. 입으로 코로 고작가의 털을 잔뜩 먹은 기분이다. 채원은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위이잉~ 소리에 깜짝 놀란 고작가는 얼른 침대 위로 올라가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 고작각의 행동이 내심 귀여웠지만 채원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한다. 표정으로 드러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청소가 끝나고 고작가의 밥을 챙겨주기로 했다. 일희일비에서 미리 준비해 주신 사료와 캔을 적당하게 덜어 예쁜 밥그릇에 덜어주었다.
"고작가 밥 먹어~"
"너는?"
"나?"
"나도 먹어야지"
"같이 먹자, 내가 기다릴게"
"아이고~ 됐네요. 얼른 식사나 하시죠~"
피식 웃으며 주방 쪽을 향해 걸어가는 채원, 고작가는 채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한때 나의 전부였던 여자였다. 고작가는 이렇게라도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고작가가 잠시 생각에 잠기던 사이 주방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채원아 움직이지 마."
채원은 상부장에 있던 예쁜 유리컵을 꺼내려다가 그만 손에서 미끄러져 버렸다. 고작가는 유리 파편 사이를 가르고 채원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고양의 특유의 섬세함으로 유리조각 사이사이에 발을 내딛는 고작가. 채원의 가까이까지 다가가 채원의 상태를 살핀다.
"괜찮아? "
"현관에 있는 실내화 좀 가져다줘."
"응 알겠어, 움직이면 안 돼."
"응..."
유리조각 사이를 지나 현관쪽 으로 가는 고작가를 바라보는 채원은 속으로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며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느낀다. 실내화 하나를 물어다 주고 다시 현관으로 가서 다른 한쪽도 가져다주는 고작가.
"고마워.."
" 이거 신고 조심해서 치워야 해."
"응, 너도 조심해"
채원을 뒤로하고 고작가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서 채원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가 치워줘야 하는데.. ' 고작가는 답답한 마음과 아직도 허당인 채원을 보호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겨우 유리컵 조각들을 정리하고 청소리고 다시 한번 작은 조각들을 치웠다. 마지막으로 물걸레로 아주 작은 조각도 남아있지 않은지 확인한 후, 채원은 침대로 와 걸터앉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고작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화부터 내기 시작한다.
"채원아, 그러니깐 좀 조심했어야지! 어휴!"
"내가 일부러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위험할 뻔했잖아. 넌 여전히 조심성이 없어!"
"여전히? 여전히? 하... 어이가 없다."
"아니 그러니깐, 조심했으면 됐잖아. 네가 다칠 뻔..."
"넌 항상 그런 식으로 날 다그쳤어, 예전부터 지금까지."
"네가 다칠까 봐.. 그래서..."
"좀 다정하게 말할 수는 없어? 그렇게 속상한 마음을 화로 표현하면 좋아?"
"그런 게 아니라..."
"너의 표정과 말은 항상 달라, 그게 걱정인지 미움인지 사랑인지 항상 헷갈린다고!"
"채원아.."
"됐어!"
잔뜩 화가 난 채원은 휴대폰과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고작가는 긴 한숨을 쉰다.
"아직도 넌 바보같아, 아직도..."
채원이 나가버린 공허한 공간이 숨이 막힐 듯 답답하게 느껴진다. 채원이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 가까이 다가가 집에서 멀어지는 채원을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고작가는 무언가 결심한 듯 창문 방충망을 앞발로 요리조리 밀기 시작했다. 조금씩 벌어지는 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내가 나갈게, 이건 내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야.'
이대로 나가면 언제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녀를 다시 아프게 하기 싫었다. 창문 밖으로 나온 고작가는 채원의 방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기다렸다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다시 너를 아프게 해서...'
근처 편의점에 도착한 채원은 냉장고를 열어 캔 콜라 하나를 덥석 잡는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거친 숨소리를 내며 계산대 앞으로 다가간다. 계산이 끝나자마자 채원은 캔 콜라를 열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한다.
"아휴, 열받아... 진짜."
채원의 심장이 요동친다. 그러다 문득 고작가를 혼자 두고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다.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게.. 휴..."
혼잣말을 되뇌던 채원은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콜라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격해졌던 감정이 탄산과 함께 날아간 기분이다.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한 채원은 현관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인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너무 화만 내고 나왔네..'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딸깍-
"고작가... 미안... 해..."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채원은 일단 사과부터 한다.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침대 쪽으로 옮긴 채원은 고작가의 흔적이 없는 침대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란다.
"고작가! 고작가! 어딨어~ 장난치치 말고 나와!"
집안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고작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 창문 방충망 사이로 벌어진 틈을 발견한다.
'고작가...'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채원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채원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한 방울 두 방울 채원의 시야가 천천히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