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채원은 일단 사과부터 한다.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침대 쪽으로 옮긴 채원은 고작가의 흔적이 없는 침대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란다.
"고작가! 고작가! 어딨어~ 장난치치 말고 나와!"
집안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고작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 창문 방충망 사이로 벌어진 틈을 발견한다.
'고작가...'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채원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채원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한 방울 두 방울 채원의 시야가 천천히 흐려졌다.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까만 밤이 지나고 푸른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찾아왔다. 채원은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고 채원의 방은 적막하기만 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원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너무나도 고민스럽다.
'고작가.. 별일 없겠지?..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밥그릇과 물그릇을 바라보던 채원은 외투를 집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평소에도 길냥이들이 자주 모여있는 근처 공원으로 달려간다. 공원에는 작은 고양이 식당이 있었다. 누군가가 꾸준히 사료와 물을 부족하지 않게 놓아두었고 배고픈 고작가가 그쪽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했다.
공원 앞 횡단보도 앞에 서서 짧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채원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진다. 발을 동동 굴리며 손톱을 물어뜯던 채원은 신호가 바뀌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려 공원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니 고양이 몇 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기, 고작가가 저기 있을지도 몰라..'
고양이 식당이 가까워져 올수록 채원의 심장 박동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고작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도 없네.."
고작가는 그곳에 없었다. 엄마 고양이 한 마리와 아기 고양이 여러마리가 채원을 경계하며 털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채원은 고양이들이 사료를 먹을 수 있도록 몇 걸음 떨어진 작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고양이들을 바라볼수록 고작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한편, 채원의 집에서 나온 고작가는 춥고 배고픈 밤을 보냈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 했던가. 어딘지도 모를 바닷가 근처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해변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과 강아지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으로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던 고작가는 갑자기 외로워졌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만 들었다.
' 아, 배고파. '
고작가가 혼자 있는 걸 본 사람들이 하나 둘 가방 속에 있던 츄르를 꺼내어 고작가 근처로 다가왔다. 아마 길냥이인 줄 알았나 보다. 눈앞에 낯선 사람들과 츄르가 있지만 선뜻 다가가기가 어렵다.
'내가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인가? 일단 배부터 채우고 봐야지.'
사람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츄르 한 입을 먹으니 멈출 수 없는 맛의 향연에 매료되어 동공이 서서히 확장되고 있다. 고작가의 묘한 눈동자에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고작가의 사진과 함께 여러 개의 해시태그가 붙었다.
#길냥이 #츄르 #함덕해수욕장 #삼색이 #냥스타그램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채원은 인스타그램에 고작가를 찾는다는 글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피드에 글을 작성하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일희일비에서 온 전화였다.
"인스타에 고작가랑 비슷한 고양이 사진이 떠있더라고요 채원 씨."
"사실.. 어젯밤에 고작가가 집을 나갔어요..."
"아, 역시.. 그랬군요. 고작가랑 너무 많이 닮았더라고요. 채원 씨 함덕 해수욕장이요! 고작가가 거기 있어요."
"감사해요 너무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가볼게요."
채원은 급하게 택시를 타고 함덕으로 향했다. 제발... 고작가가 그 자리에 있기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짧은 이동시간이었지만 채원의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택시 안에서 인스타그램을 열어 '#함덕해수욕장' 태그를 타고 들어갔다. 여기저기에 고작가 사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작가는 모르는 여자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었고 고작가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고작가..너..어떻게 거기까지..'
채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함덕 해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있는 곳을 향해 채원은 미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깊은 목소리로 저 멀리 보이는 고작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고작가!! 너~~~"
마음과는 다르게 소리부터 지르며 돌진하는 채원, 고작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고작가를 품고 있는 여자에게서 성큼성큼 다가가서 고작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고작가를 째려본다.
"너! 네 마음대로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이 없는 고작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멀어진다. 지금 이 순간 이 구역의 미친년은 바로 나다.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고작가는 채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왜 왔어"
"뭐? 왜?"
"그래 왜!"
"그건.. 그건.. "
"그건 뭐!"
"네가 너무 걱정되니까!"
드넓은 해변에 어떤 여자가 고양이를 안고 여전히 소리치고 있다. 사람들은 이상한 듯 힐끔거리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채원과 고작가 뒤로 핑크빛 노을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싫어"
"싫기는 뭐가 싫어!!!!!!"
모래 위를 펄쩍펄쩍 뛰는 채원을 고작가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소리치고 나갈 때는 언제고"
미안함에 할 말을 잊은 채원이 고작가를 힘껏 껴안는다.
"그건... 내가... 미... 미안해... 밤새도록 걱정했단 말이야.."
고작가는 사과와 진심을 전하는 채원을 보자 마음이 약해져 못이긴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일단 가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 다음에 또 소리 지르고 뛰쳐나가기만 해봐. 그땐 진짜 가만 안 둬!"
불안했던 마음은 이제 잔잔하게 밀려드는 작은 파도가 되었다. 둘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채원의 집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채원의 집.
하루 만에 시커멓게 변해버린 고작가를 씻겨야겠다고 생각한 채원은 욕실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한다.
"왜 뭐 하게?"
"너 씻어야지. 지금 너 까만 고양이야. 삼색이 아니라고!"
"아~ 싫어 물 싫어 진짜 싫어"
"이 상태로 내 침대에 한 발자국도 들일 수 없어!"
채원은 고작가의 목덜미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욕실로 데려간다. 고작가의 발톱에 모든 힘을 모아서 마지막까지 반항해 보지만 채원은 고작가를 서서히 욕조에 넣고 반신욕 상태로 씻기기 시작한다.
벅벅- 빨래 수준의 목욕을 하는 동안 고작가는 여러 번의 고성을 질렀다. 살려달라고 애원도 했다. 하지만 채원의 깔끔함을 고작가는 이길 수가 없었다. 두 번 세 번을 씻어도 여전히 시커먼 물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길래... ㅉㅉ"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더러워 죽겠어 정말"
"쪽팔리게 진짜... 나 목욕 안 해!"
"뭐래, 조용히 협조하세요!"
카리스마 있는 채원의 말에 슬슬 눈치를 보는 고작가. 채념한 듯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작가의 목욕을 끝내고 귀엽게 수건에 돌돌 말아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이제 한숨 돌리려는 찰나. 누군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가와 채원은 현관 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