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가의 목욕을 끝내고 귀엽게 수건에 돌돌 말아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이제 한숨 돌리려는 찰나. 누군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가와 채원은 현관 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침을 꼴깍 삼켰다.
"채원아~"
채원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
'뭐야, 저 재수 없게 잘생긴 놈은!'
채원의 당골 카페.
하얀색 벽면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채원이 살고 있는 동네의 한적한 골목 1층에 자리하고 있다. 코너에 있는 건물이라 양면이 통창으로 되어있어 밖에서도 안이 훤하게 잘 보이는 개방감이 있는 곳이다. 인테리어는 깔끔하게 스틸 타입으로 되어있고 중간중간 우드가 섞여 차가운 느낌을 보완하고 있다. 한쪽 벽면에는 콜드브루를 만들기 위한 기구가 벽을 채우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작은 산타 인형도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작은 주방 안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고 그 뒤로는 바 형태의 테이블이 있다. 채원은 항상 바 테이블에 잠시 앉아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같은 커피로 준비해 드릴까요?"
남자는 채원을 등 진 채로 말을 걸어왔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라테 한 잔 어떠세요."
"네? 아... 저는... 괜찮..."
평소와는 다르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당황한 채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주 조금만 드셔보세요."
하얀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는 여전히 채원에게 등만 보이고 있다. 남자는 원두를 갈아 기계에 얌전히 넣고 진지하게 수동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정성스럽게 내린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섞어 작은 얼음 몇 조각만 살짝 떨어뜨린 후 채원에게 건넨다.
"지금이 제일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술잔처럼 작은 잔에 담긴 라테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 잠깐 눈인사를 전하고 한 입 먹어보던 채원은 갑자기 눈이 커진다.
"어머! 맛. 있. 어. 요!"
"그렇죠?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매일 아메리카노만 드시잖아요. 가끔은 라테도 드셔보세요. 제가 특별히 맛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감사해요. 다... 다음에... 지금은 제가 출근을 해야 해서..."
아메리카노를 받아들고 서둘러 카페를 나오는 채원. 오랫동안 사장님과 손님으로만 마주했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기분이었다. 커피향을 타고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아슬아슬하게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채원이 골목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채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남자는 얼굴에 얕은 미소를 띠며 혼자 중얼거린다.
'내일은 꼭 번호를 받아야지.'
다음 날, 채원은 카페를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분명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채원에게 라테를 건네는 남자의 표정을 이미 읽어버렸다. 카페를 가지 말까? 세상에 카페가 얼마나 많은데. 다른 카페로 갈까? 아니야. 그럼 오늘만 커피를 포기해? 안돼. 아무리 그래도 채원은 카페의 특별한 커피는 포기할 수 없었다.
채원에게 모닝커피보다 더 중요한 일정은 없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애써 당당한 척 카페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저.. 오늘은 아이스 라테로..."
"어제 드셨던 라떼가 입에 맞으셨나 봐요. 잠시만요."
어제와 다른 온도차. 평소처럼 주문을 받고 뒤돌아서서 커피를 만들기 시작한다. 채원은 자연스럽게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커피를 내리는 남자라... 채원의 이상형 목록에는 없었지만 어제부터 바리스타라는 직업에 잔뜩 호기심이 생긴 채원이다. 남자가 바쁘게 커피를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채원의 마음이 왠지 싫지 않았다. 속으로 '나쁘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는 찰나. 남자가 채원에게 준비된 커피를 건넨다.
채원이 커피를 잡으려고 손을 뻗은 순간, 남자가 커피를 허리 뒤로 감추며 정중하게 말했다.
"저.. 실례가 안된다면 핸드폰 뒷자리 4개만..."
"네? 제가 왜..."
멀뚱멀뚱 쳐다보는 채원의 표정에 웃음이 터진 남자.
"아, 그게 아니라. 적립.. 안 하세요?"
웃고 있는 남자와 달리 웃을 수 없는 채원.
"아니요, 적립 괜찮아요. 커피만 주세요.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채원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최대한 빠르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런 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부끄러워하는 채원이 마냥 귀엽기만 한지 채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 쪽팔려. 당황하지 말았어야지."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서둘러 골목을 벗어나는 채원. 둘 사이의 무게중심이 남자 쪽으로 쏠린 것 같아 채원은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하루에 하루를 더해 둘은 조금씩 가까워 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채원의 커피를 책임지는 이 남자는 어느덧 채원의 옆자리를 채워주는 든든한 연인이 되어갔다.
멀리서 잠이 덜 깬 채 비틀거리며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채원. 채원을 다정하게 맞이하는 남자
채원의 남자친구 '준'이다.
"자, 여기 커피.'
"고마워 준이 씨. 저녁에 우리 집에서 떡볶이 콜? 아악, 나 늦었어 나중에 통화해."
"으이구, 알겠어. 얼른 출근해."
"혹시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깐. 먼저 들어가 있어~ 비밀번호 알지? "
늦잠을 자도 커피를 포기할 수 없는 채원의 엉뚱함이 준이는 내심 사랑스럽다. 오랫동안 채원을 바라보며 마음을 키워왔던 준. 채원과의 저녁 약속에 하루 종일 기분이 들떴다. 채원에게 줄 작은 꽃다발을 주문해두고 노을이 질 때까지 채원을 그리며 기다렸다.
카페를 마감하고 채원에게 줄 작은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채원의 집으로 갔다. 기뻐할 채원의 얼굴을 그려보며 준이의 마음도 행복했다. 채원의 집 앞에 도착해 보니 거실에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먼저 도착했나 보네?'
채원의 집 앞에서 벨을 누르고 기다리는 준. 하지만 집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느낀 준은 미리 알고 있던 비밀번호를 네 자리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준이의 눈앞에 채원과 수건에 돌돌 말린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