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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씨 Aug 18. 2022

assay #17



창 밖을 내다보니 어느 때보다 고요함이 밀려왔다. 나름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논바닥이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지붕들이며 온통 하얀 고요에 잠겨 있었다. 거리엔 아무도 없고 오직 침묵만이 희고 차가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잠옷 위에 두꺼운 점퍼를 입고 맨발로 베란다에 놓여진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은 채로 옥상 뒷마당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색 융단이 깔려 있다. 자국이 남지 않도록 바라만 볼까 하다가 조심스레 한 발을 눈 위에 올려본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물건들을 일부러 흐트러트리고 마는 장난꾸러기처럼.


슬리퍼 앞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에 눈이 닿을 때마다 차가움에 온 몸이 저릿저릿하다. 하지만 한 번 눈 위에 올라서고 나니 발자국 만들기에 정신이 팔려 이내 걷고 또 걸어 길을 만들어 버렸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도 미처 내려오지 못한 눈이 채워져 있는 듯 내가 서있는 곳이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상자 같다고 생각했다.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처마 밑으로 기어들어가서는 쪼그리고 앉아 점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담배를 꺼냈다.


“후우......” 나는 겨울에 피우는 담배를 좋아했다. 차가운 공기 탓에 밀려 나오는 입김에 담배 연기가 묻혀 내가 꼭 용이 된 듯도 하고, 마음만 먹으면 연기를 저 멀리까지 뿜어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침착한 고요와 담배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발가락과 볼이 벌겋게 홍조를 띠고 소매 끝으로 얄밉게 내밀어 놓은 손끝도 시리지만 태울 수 있는 만큼 끝까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옥상 위의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흩어진다. 모락모락……. 슬슬 옆집에서 밥 짓는 냄새가 올라오고 보글보글 찌개 냄새가 허기진 배를 자극한다. 새벽 내내 눈이 내린 일요일 아침은 그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밤 10시 30분 소주 한 잔을 하고 건대역 플랫폼 맨 끝에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내린 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땅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제법 커다란 눈송이가 이마에 내려앉아 곧 녹아버려 얼굴을 타고 물이 흘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술 취한 아저씨마저 상기된 표정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은 주위의 소음이 모두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싱글싱글 웃음을 날리다 건너편 플랫폼에 서있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서 계속 웃고 있자니 상대편이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너를 향한 웃음은 아니었으니까.


헤드폰에서 Damien Rice의 Cold water가 흘러나온다. 이런 날 참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고요하던 플랫폼에 전동차가 들어선다. 멀리 비쳐오는 라이트에 눈이 반짝이고 귀에 울리는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아침이면 이 고요는 소란스러운 이웃의 투덜거림으로 묻혀버리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엔 마음이 포근하다. 예전 그날처럼 내가 눈으로 만들어 놓은 상자 안에 홀로 서있는 것처럼. 매우 따뜻하고, 매우 포근한 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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