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에 일곱

7. 벚꽃의 습격

by 늙은 아빠

멈춰있지만 생산적으로 보일 도피처가 필요했다. 입출입이 당당한 건 청량리 모텔보다 광진구 워커힐이 나은 것처럼 중년의 격식과 체면에 어울리는 건 pc방보단 도서관이었다. 멈춰있고 숨어 있는 건 어느 곳에서나 같았지만 선택지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정답이 아닌 선택지만 남았어도 둘 중에 하나는 골라야 했다. 최대한 덜 틀린 오답을 고르는 기회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퇴실 방송이 나오고서야 어둠이 투명하게 반사되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하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여드름이 붉게 영근 아이들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쉴 새 없이 써 내려갔다. 사각사각 꿈이 영그는 소리, 백발의 신사가 돋보기를 꺼내 바흐친의 ‘소설 미학’을 관찰하듯 탐닉하는 모습이 멋스러웠다. 도서관은 플레이어가 아닌 관객으로도 함께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주말 오후 도서관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이태준의 ‘아버지가 읽은 문장강화’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과거엔 문체를 시대가 가졌고 현대엔 문체를 개인개인이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문체론은 개인 문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침묵의 활기가 좋았다. 갓 깨어난 환자가 갈비탕을 흡입할 수 없듯 스미는 온기가 멈춰있던 심장을 어루만졌다.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 적당한 나이에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것 또한 과거의 문체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과거의 삶을 사는 사람이니 난 현대를 살면 된다고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내 삶을 사는 건 아니라고 자위했다.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는 않았다.


나른한 햇살은 번지고 봄의 노랑이 창 너머 오가는 사람들을 아련하게 적시고 있었다.



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개구리가 잠든 연못에 던지는 돌멩이. 평온을 깨는 자극에 황급히 놀라 열람실을 빠져나왔다.



지금 만나는 사람 없지?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만나볼래?


아,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아직…….



감사하게도 상대의 말투는 공손하고 단호했다.



상대에게는 이미 말해 놓았어. 너무 괜찮은 사람이야. 일단 만나봐. 연락처 남겨 놓을 테니까 꼭 연락해.



개구리가 잠에서 깨는 3월이었다.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이 거리 곳곳을 하얗게 채색하는 3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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