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그냥 놔둬요

by 혜일

얼마 전, 주말이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경비실 옆 재활용 쓰레기장이 눈에 띄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택배용 상자들, 질서 없이 가득 쌓인 종이와 플라스틱들. 그 장면을 본 순간 한 사람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아차. 반장님이 이제 안 나오시는구나.


내가 사는 아파트는 토요일 낮부터 월요일 낮까지만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다. 주말이 너무 바쁘면, 밀린 숙제를 해치우듯 월요일 오전에 재활용 쓰레기를 가지고 내려간다. 우리 집만 해도 그 양이 버릴 때마다 상당하다. 그러니 수거차가 올 때까지 여러 세대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을 모아놓는 일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포대에 담긴 종이나 비닐, 플라스틱은 넘치지 않도록 눌러주고 정리하는 손길이 중간중간 필요하다.



거대하게 쌓인 재활용품 더미 사이로 늘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시며 일하시는 경비 반장님이 계셨다.



그날도 여느 주말처럼 재활용품을 넣을 수 있는 포대 자루가 군데군데 단정히 놓여있었다. 택배 물건이 담겼던 종이 상자들은 크기별로 차곡차곡 쌓여있고 꼭 선물상자처럼 윗 뚜껑은 십자 모양으로 잠겨 있었다.



반장님은 보통 일에 열중해 계셨다. 그러면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고는 조용히 쓰레기 분리를 하고 들어온다. 그런데 그날은 반장님이 날 보시더니, 먼저 말을 건네셨다.



"그동안 어디 갔다 왔어요? 애들이랑 계속 안보이던데..."

그러고 보니 이런저런 일정으로 집을 비워 반장님 얼굴을 뵌 것이 꽤 오랜만이었다.



"나 이틀 더 일하면 이제 마지막이에요."

그 말씀에 깜짝 놀란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주춤했다. 예상치 못한 말씀에 멍해졌다.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려 하셨는지 반장님은 뜬금없이 물으셨다.



"올해 어머니가 몇 살이셔요?"

"시어머니는 72세시고요, 친정어머니는 67세예요."


뒤이어 반장님과 나는 재활용품 분리가 다 끝날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 75세가 되셨다는 반장님은 11년 간 우리 아파트에서 일을 했다고 하셨다. 우리 가정이 이사 오기 전부터,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계셨던 것이다. 고만 고만한 나이의 단지 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그동안 쭉 지켜보셨겠구나 싶었다. 마치 친할아버지처럼 말이다.




반장님이 내게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이 있다.

그 말은 바로 "그냥 놔둬요."



"그냥 놔둬요. 내가 정리할랑게."


아이들이 어릴 때, 유치원 차량이 오는 시간에 맞춰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곤 했다. 아저씨는 내 옆에 가방 메고 서 있는 우리 집 꼬마들과 꼭 인사해주셨다. 그 뒤에는 바쁘니까 쓰레기를 그냥 두고 가라 말씀하셨다. 당신이 대신해주시겠다면서. 실제로 그렇게까지 부탁드릴 수는 없었지만 말씀 만으로도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놔둬요. 내가 치워줄랑게."


살림을 하다 보면 어떤 물건들은 어떻게 버려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못 쓰게 된 나무 도마나 깨진 도자기 그릇, 솜이불 같은 것들이다. 양이 많으면 따로 배출 봉투를 구입해 버리면 되지만 그 양이 적을 때는 버리기 애매하다. 처치 곤란한 물건들을 한 손에 들고 헤매고 있을 때마다 반장님은 그냥 놔둬요. 다른 물건들이랑 같이 모아서 버릴랑게. 하시며 해결사 역할을 해주셨다.



"아이들 훌륭하게 잘 키우고 건강히 지내요."

"네, 감사해요. 그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반장님과 마지막 인사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진심을 담아 꾸벅 인사드렸다. 반장님은 근처 다른 동에 사시지만, 일을 그만두시면 다시 뵙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지막 만남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그동안 도움만 받고 해 드린 게 없어 죄송한 마음이 일었다. 김치전을 부치면, '몇 장 갖다 드릴까?', 김밥을 싸면, '한 두줄 갖다 드릴까?' 이렇게 생각만 하곤 실제로 드린 적이 없었다. 오지랖인 것 같아, 그냥 다음번에, 나중에... 그런 식으로 마음을 미뤄두곤 했다.



어떤 일이 하기 싫거나 부담스러울 때 나는 부러 '마지막'을 상상하곤 한다. 언젠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못 하는 날이 올 거야. 내일 당장 내 삶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니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지막'에다 '기회'라는 단어까지 덧붙이면 어느새 나는 생각과 몸이 그 일의 방향을 향하게 된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자. 이렇게 속으로 되뇌면 금세 의욕과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일과 달리, 관계에 있어서는 이 '마지막'이란 유효기간을 잘 적용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모든 풍경은 계속 제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았다. 오래된 풍경은 있어도 영원한 풍경은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화단 앞을 빗질하던, 자전거를 타고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던, 재활용 쓰레기장을 자기 집 안처럼 살뜰히 정돈하던. 그 아름다운 사람의 풍경이. 오래되었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반장님이 떠나신다던 날 저녁, 길 건너 동네 마트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며 바로 앞에 자리한 경비 초소를 힐끗 보았다.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반장님이 사복을 입고 앉아 계신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는 그 길로 달려가 포도 한 상자를 사다 안겨 드렸다.



"떠나는 사람한테 뭘 이런 걸 줘요? 해 준 것도 없는데..."

"사모님이랑 같이 드세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건강하세요, 아저씨."


그렇게 진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반장님은 연거푸 해 준 게 없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그리곤 아이들을 밑으로 내려보내 줄 수 없겠냐고 하셨다. 만 원씩이라도 용돈을 주시겠다면서. 나는 마음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그냥 받을 걸 그랬나 싶다. 왠지 미안해하실 것 같다.



며칠 사이 새로운 경비 반장님이 오셨고 재활용 쓰레기장도 예전처럼 정돈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그 반장님이 계실 것만 같다. 포도는 맛있게 드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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