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일 May 12. 2023

울지 않은 결혼식

언니의 결혼을 축하하며

영화 '어바웃 타임'의 결혼식 장면을 좋아한다. 천막 아래로 물폭탄이 터지고 우산이 뒤집히는 폭풍우 속에서도 천진난만하게 웃는 신부, 메리의 얼굴을 특히 좋아한다. 그리고 결혼식 장면 내내 흐르는 지미 폰타나의 칸초네, '일 몬도(Il Mondo)' 역시 메리가 입은 붉은 드레스만큼이나 강렬하고 낭만적이다.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영화의 메시지가 씩씩해서 좋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팀은 메리와의 인연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자주 써먹는다. 하지만 삶은 시간을 되돌린대도 완벽할 수 없고, 주어진 하루를 여행하듯 최선을 다해 만끽해야 한다는 것.



언니가 며칠 전 결혼을 했다. '어바웃 타임' 속 비바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날도 비가 내렸다.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 때문인지 비 오는 날의 결혼식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년 전 야외 결혼식을 했던 우리 부부 생각이 났다. 예식장은 남산의 숲 속이었는데 우린 그곳이 마음에 들어서 다른 곳은 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하지만 결혼식 날이 다가올수록 날씨 어플을 계속 쳐다보며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예식 당일에는 날이 화창했고 가을 햇볕은 드레스를 입은 등이 따가울 만큼 뜨거웠다.



사실,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되든지 지나고 나면 그저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는다. 결혼식보다 '결혼 생활'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하지만 신랑, 신부의 마음이란 그때의 우리처럼 간절할 것이기에 비가 얼른 그치기를 바랐다.  



오후 1시. 오랜만에 정장을 차려입고 정성껏 화장을 하고서는 예약된 시간에 미용실을 찾았다. 습한 날씨에 드라이를 한다 해도 머리는 주저앉을 게 뻔했지만 마음만은 설레었다. 언니의 결혼식날은 나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정식으로 생기는 날이었으니까.




언니의 결혼식 일주일 전. 예비 형부까지 다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데 누구보다 아빠가 좋아하셨다. 아빠는 이제 우리 가족이 '완전체'가 되었다는 말을 하시며 연신 밝은 표정을 지으셨다.



"사람들이 휴대폰 사용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단 생각을 해.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어. 충돌하고 멈출 것 같은데도 말이야. 그만큼 섬세하고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어서 그래.

사람 관계도 마찬 가지인 것 같아. 이 세상에 왔다가 그냥 가는 존재는 없거든. 인연이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야. 통신망처럼 촘촘히 짜이고 하나하나 다 계획된 거라고 봐, 나는."



와인 한 잔에 술술 풀려나오는 아빠의 말과 그 불콰해진 얼굴빛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친정 식구들과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의 공백이 생겼다. 통화는 잘해야 일주일에 한 번, 찾아뵙는 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 가장 마음 쓰이는 건 남동생을 자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편의점과 다이소, 검은색을 좋아하고 아기자기한 소품, 그것도 '신상' 물건은 족집게처럼 골라내는 내 동생. 특별한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나 성인이지만 언제나 열세 살, 소년의 시간을 살고 있다.



언니는 주말이면 동생을 카페에 데리고 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 자매들의 단톡방엔 언니가 찍은 남동생 사진이 올라왔고 나는 멀리서나마 동생의 기분이나 표정을 살필 수 있었다.  햇볕 좋은 창가에서 근사한 브런치를 즐기는 모습, 친정집이 있는 파주의 들녘 풍경,  남동생이 그린 펜 그림을 찍은 사진 등.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모두의 안녕에  안도하면서도 언니의 여유가 부럽기도 했다. 언니는 돌봄의 의무감으로 무거워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능력이었다.




오후 4시 반. 예식 시간이 다 되도록 비는 그치지 않았다. 삼삼 오오, 빗 속을 뚫고 도착한 하객들과 인사를 하자 비로소 언니가 결혼하는 날인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고모들과 이모들, 어릴 적 명절이면 늘 뵈었던 친척 아저씨들, 멀리 오스트리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사촌 동생까지. 꿈처럼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이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잘 지냈지?"라는 인사 한 마디와 서로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 



오후 5시. 예식이 시작되었다. 신랑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정성껏 준비된 결혼식은 축제 같았다. 화동이 된 작은 아이가 제 역할을 무사히 마치자 나 역시 결혼식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결혼식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뒤늦게 피로연장에 모인 가족들. 이곳 음식이 특별히 맛있는 것 같다며 서로 권했지만 뷔페 접시는 계속 그대로 있었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느라 배고팠던지 남동생은 혼자 몇 접시를 열심히 비워냈다. 수육과 크림 파스타를 특히 잘 먹었다. 나는 옆에서 담아주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부가 넌지시 말했다.

 


"어제 H가 울었어요."

"정말요? 왜 울었어요?"


평소엔 남동생이 우는 모습을 잘 보지 못해 나는 몹시 궁금하고 놀랐다.



"큰 누나 이제 집에 안 온다고 그랬더니 어깨를 들썩이면서 엉엉 울더라고요."



언니 결혼식 전날 밤의 일이었다. 파주에서 결혼식장으로 출발하는 버스 안내 때문에 제부와 여동생은 친정에서 잤고, 매형이 장난스레 던진 말에 남동생은 속상한 나머지  울어버린 것. 그래서 모든 가족이 남동생 방에 모여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는 것.  



이전 날 상황과 함께 엄마는 쾌활한 목소리로 덧붙이셨다.



"오늘은 결혼식 내내 하나도 안 울었어. 어제 미리 다 울어서."



그래서 아무도 울지 않았구나. 울 수 없었구나.

뒤늦게나마 나 혼자 울컥하고 말았다.



오후 7시 30분. 하객들은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직원들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온종일 분주하게 움직였던 우리는 다시 한번 완전체가 되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햇볕 한 줌, 바람 한 자락이 필요한 날에 자동 반사처럼 꺼내 볼 가족사진을.



아마도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순간순간 서로의 빈자리를 실감하며 마음이 먹먹해질 것이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우린 또 만날 것이다. 가족이라는 인연에 속으로는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렇게 각자의 삶을 여행하다가 우린 또 휴게소 같은 친정집에 모여 어린애들처럼 웃고 떠들 테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 언니를 마음 다해 응원한다.


우린 모두 함께 시간 여행을 한다. 매일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 보낸 답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