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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May 25. 2023

대파 카레

모든 것을 갖추지 않아도

친정에서 머물던 주말. 엄마는 아침 식사 메뉴로 카레를 만들고 계셨다. 커다란 냄비에는 전날 구워 먹고 남은 소고기 등심이, 넓은 접시에는 감자와 양파, 송이버섯과 당근이 깍두기 모양으로 담겨 있었다.



"와, 소고기! 고급 카레네!"

"근데 파란 게 없네?"

"엄마, 카레는 그냥 냉장고에 있는 재료만 넣어도 맛있잖아요."

"그래도. 피망 한 개만 있었어도 좋았을걸."



엄마 말씀 속 '파란 것'이란 초록색 야채를 뜻한다. 감자, 양파, 송이버섯은 모두 하얀 것들. 당근의 주황색은 독보적이어서 익힌 야채를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은 그것을 더욱 열심히 골라낼 것만 같았다. 초록 야채 하나가 빠진 아쉬움이 내 머릿속에도 스쳤다. 하지만 본디 무슨 색인들, 냄비에 들어가면 전부 카레빛 노란색으로 물들여질 텐데. 아무려나, 엄마 편한 대로 하셔도 괜찮아요 이제는.   



사실, 친정에 머물고 있어도 아침 식사 정도는 내가 준비했어야 했다. 친정에 가기 며칠 전, 엄마와 통화를 했다. 한쪽 손목이 시큰거리고 아파서 약을 처방받았다는 엄마. 손목 통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벌써 십 년 이상 반복되고 있는 증상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주방에는 전에 없던 식기 세척기도, 다용도실 한편에는 세탁 건조기도 생겼다.  



-병원에서 뭐래요?

-무조건 손을 쓰지 말라고 그러지.

-맞아요. 집안일은 당분간 하지 마세요.

-그래. 요즘엔 아빠 밥도 한 번씩 건너뛴다니까.



엄마와 이렇게 통화하고서도 친정집에서 자는 날이면 어김없이 철없는 아이로 돌아간다. 엄마의 아픈 손목은 새까맣게 잊은 채, 해주시는 밥과 반찬을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마는 것. 이렇게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커다랗기만 하다.





잠에서 깨면 당연한 듯 맞이했던 아침 시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때. 한겨울 깜깜한 아침에도 엄마의 주방은 매일같이 밝았다. 나는 보통 7시면 집 밖을 나섰는데, 머리를 감고 나면 꼭 화장대 앞에 먹을 것이 놓여 있었다. 잣이 씹히는 율무차, 포일로 감싼 딸기잼 토스트, 아몬드를 섞어 믹서로 간 바나나 주스 같은. 엄마가 두신, 내 몫의 아침밥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이전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잠들었는지 상관없이 오늘 아침은 무사히 출발해도 된다는 신호. 화장대 앞에 앉아 다시 거울을 바라보면 열린 문 뒤로 주방 앞에 서 있던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식탁에 함께 앉아 밥 먹을 시간조차 잘 내지 않던 딸. 다 큰 딸임에도 빈 속으로 나가지 않도록 엄마는 아침마다 신경 쓰셨다. 내가 좋아할 만한, 간단하고 맛있는 영양간식들. 나는 그것들을 '고마워요.'나 '잘 먹을게요.' 같은 말도 없이, 가방 속에 챙겨 허겁지겁 출근하곤 했다. 이제야 깨닫는다. 아침마다 현관문을 밀치고, 어딘가로 출발할 수 있었던 힘은 엄마의 손을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아마도 그 시작은 혼자서 유치원을 갈 수 있을 무렵부터였겠지.





식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았다. 오목한 접시에 소복이 담긴 카레를 보자마자 군침이 마구 돌았다. 그런데 신기했다. 카레 밥 위에는 번듯하게  '파란 것'이 보였다. 그것은 보통 카레 재료로 쓰이는 피망이나 브로콜리, 심지어 애호박의 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초록빛만큼은 생생하고 진했다.



"엄마, 이거 뭐예요?"



나는 젓가락으로 납작하게 눌린 '파란 것'의 정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뭐냐면 있잖아... 대파야!"



엄마의 대답에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파'란 것은 정말 '파란' 것이었다. 카레가 끓고 있는 동안 송송 잘린 대파 줄기를 나도 보았는데. 국이나 찌개는 없는데 저것을 어디에 넣으시려나 했다. 설마 카레 안에 들어갔을 줄이야. 대파 줄기까지 넣으며 기어이 '파란 게' 들어가도록 만든 엄마의 정성이란. 그러고 보니 엄마의 이러한 신선하고도 귀여운 응용력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다. 감자 대신 당근이 들어간 된장찌개나 쑥갓 대신 깻잎을 썰어 넣은 매운탕 같은.



레시피 재료대로 만든 음식이 맛있겠지만 꼭 똑같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끔씩은 내 방식대로 재료를 더하거나 빼기도 하며 색다른 맛을 찾아보는 것. 수십 년간 한결같이 주방을 지킬 수 있었던 엄마의 비결은 어쩌면 이런 호기심과 재미를 놓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빠져있거나 예상치 못한 재료가 들어가 있어도 엄마의 음식은 늘 맛있었다. 살아가며 모든 것을 갖추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글을 쓰다가 궁금한 마음에 찾아보았는데, 놀랍게도 대파 카레 레시피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껏 카레에는 감자와 당근, 양파 같은 야채만 넣는 줄 알았는데. 대파의 진액과 은은한 향이 고기의 잡내를 제거하고 카레의 풍미를 높인다고 한다. 다음에는  '파'란 게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카레를 만들어 엄마에게 한 그릇 대접해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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