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간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 홍천으로 향하는 길. 차로 달리며 끝없이 이어지는 산을 바라보았다. 봄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온통 초록 물결이다.
연초록 잎들이 돋아날 때마다 마음이 일렁이던 초봄의 기억이 벌써 아련하다. 신생아처럼 애처롭게 몸을 가누던 잎사귀들이 어느 새 산 하나를 뒤덮을 만큼 무성해졌다. 산세가 어떠하든 미덥게 잘 자란 나무들. 이제는 우리 가족을 호위하는 것만 같다. 하나의 계절이 떠나고, 새로운 계절은 그렇게 눈부신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짐을 챙겨 집을 떠나는 일이 번거로워도, 여행 오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좋은 기억을 안겨준 여행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관광 명소나 쫓기듯 먹고 나와야 했던 맛집은 기억에서 희미하다. 대신 사람의 발길이 드물고 그 지역의 날씨와 계절, 자연 풍경과 친밀감을 더할 수 있는 곳이 좋았다. 어느 해 연말에 눈 내린 바닷가를 걸을 수 있었던 속초 여행이 좋았고, 구슬땀을 흘리며 올랐던 작년 여름의 제주 오름도 좋았다.
이쪽으로 오면 꼭 생각나는, 참 오래된 여행의 기억도 있다.
20년이나 지났음에도 당시, 온몸으로 만끽했던 푸른 계절은 여전히 선명하다. 학부 2학년 때 들었던 현대 문학 수업에서 여행 리포트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단, 조건은 꼭 혼자 여행을 할 것. 혼자는커녕 여행 경험조차 별로 없던 나였지만 떠나기 전부터 무척 설레었다.
이맘때였던 것 같다. 초여름의 어느 수요일, 아침 일찍 춘천행 기차를 타고 강촌에 도착해 산과 강을 신나게 쏘다녔다. 혼자서 산을 오르내리고, 산채 비빔밥을 먹고, 마을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사이 혼자여서 어색했던 여행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졌다. 호젓하게 누릴 수 있는 시간들에 마음이 홀가분했다.
마지막 코스로 김유정 문학촌에 갔다. 그런데 개방 시간이 지난 탓에 문이 잠겨 있었다. 그렇게 서툰 여행이었다. 허탈한 마음은 이내 실레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에 사로잡혔다. 김유정 작가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아기자기하고 어여뻤던 그 마을을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홀로 떠난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터덜터덜 신남역(지금은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으로 걸어와 철로에 앉았다. 그때 정면으로 바라보았던 검은 산등성이.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 하루의 해가 내 마음 안으로 불쑥 들어와 불붙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 시간까지 누렸던 자유와 해방감이 어떤 그리움과 쓸쓸함으로 바뀌던 순간, 나는 완벽한 여행을 했다고 생각했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싶고 함께 수다 떨던 친구들 얼굴이 아른거렸다. 여행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일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홍천의 어느 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장까지 본 뒤 날이 깜깜해져서야 숙소에 들어갔다. 조금 깊은 산에 위치한 펜션이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절찬여행 중'이라는데 이곳엔 우리 말고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큰 아이가 보고 싶다던 영화 한 편을 함께 보고는 다시 밖을 나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마당에 불빛 하나 없어 주변이 온통 깜깜했다. 도시의 밤은 집 안의 모든 불빛을 소등해도 이렇게 깜깜하지 않았는데. 긴팔 옷을 입고도 산속은 몸이 오소소 하게 떨렸다. 팔을 동그랗게 말아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았다.
"별이 보일까?"
별을 찾으며 내가 말했다. 짙은 어둠을 품고 있던 밤하늘엔 얼핏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그때까지 유일한 빛은 건너편 산 위에 뜬 보름달뿐이었다.
"계속 서서 하늘을 봐봐. 별이 점점 많아지네!"
남편의 말에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보이지 않던 별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엔 서너 개씩, 그 수를 더하며 더 많이 보였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자, 별자리를 잘 알면 읽을 수 있을 만큼 하늘이 반짝였다. 사방이 고요해서 별이 뜨는 소리까지도 들리는 듯했다. 정말 별이라며, 감탄하는 서로의 높고 낮은 목소리도 감미로웠다. 흐릿했던 별빛이 또렷해진 순간, 남편과 아이들의 얼굴도 빛나 보였다. 사랑하는 이들이 정말 사랑스럽게 보이던 순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고요한 밤이었다.
같은 장면을 혼자 보았다면 어땠을까. 그 기쁨이 그리 크진 않았을 것 같다. 기쁨은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이전의 여행도 아마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좋았을 것이다. 만일 혼자였다면 눈 내린 속초의 바닷가는 뼛속까지 시렸을 것이고, 뜨거운 여름날 제주 오름은 정상까지 올라갈 시도조차 못하지 않았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여행의 조건은 장소가 아닌 사람인 것 같다.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일상을 떠난 여행지에서 우리는 여유를 얻고 누린다. 애써 큰 비용과 시간을 지불해 얻은 여유라면 그래도 값지게 누려야 하지 않을까.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어떠한지 돌아보는 여유. 사랑하는 대상을 더욱 보듬고 살뜰히 살피는 여유. 그런 여유를 잃지 않는 여행이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의 모습 속에서, 흐릿해졌던 사랑을 다시 실감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완벽한 여행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