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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Jul 08. 2023

미용실을 나서며

반복으로 온전해지는 하루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머리를 감는 일부터 욕실 하수구나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는 일, 드라이기로 말리는 일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짧으면 짧을수록 시원하고 간편하지 않을까. 이참에 시도해보지 않은 변화를 주면 어떨까. 상상 속의 내 머리카락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바로 미용실을 예약했다.



- 안녕하세요? 수요일, 오전 10시 반에 머리 예약 가능한가요?

- 네, 고객님. 가능하세요. OO 선생님으로 예약해 드릴게요.

- 네? 누구 선생님이시라고요?

- OO 선생님이요. 이전에도 이 선생님께 시술받으셨는데요.



나를 이전에 시술해 주셨다던, 스타일리스트 선생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 중에 나만 이 미용실을 이용하는데, 생각해 보니 무려 8개월 만의 방문인 것이다. 그러니 담당 선생님 이름은 물론이고 그분의 얼굴까지 가물가물했다.

 


예약 시간에 맞춰 미용실에 도착한 날, 담당 선생님이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8개월 전 내 머리를 만져주신 분이 맞나. 역시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떠올려보니 그때의 선생님과는 헤어스타일도 체형도 다른 느낌이었다. 진한 눈 화장에 마스크까지 쓰고 계시니 얼굴은 더욱 알쏭달쏭했다. 다양한 고객을 상대할 선생님도 세 계절이 지나 찾아온 나를 못 알아보시는 눈치였고.



샴푸를 빠르게 진행한 후, 선생님과 나는 스타일 상담에 들어갔다. 휴대폰을 내밀며 원하는 이미지를 보여드렸더니 선생님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이렇게 짧게요? 이건 숏 커트인데요. 한 번에 다 자르면 깜짝 놀라실 수도 있어요. 우선 단발로 적당히 자른 후에 결정하셔도 될 것 같아요."


"네, 그럼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평소, 머리카락에는 애착이 없는 편이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일까 싶었다. 하지만 잠자코 전문가의 손길에 맡겨보기로 했다. 사각사각, 선생님은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고객님은 굳이 펌을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적당히 곱슬이시거든요. 층을 내어 자르면 자연스럽게 볼륨이 사는 머리예요."



적당히 곱슬이라는 말. 아, 이 분이 맞구나. 나는 그제야 안도하기 시작했다. 8개월 전 미용실을 찾았을 때도 분명히 똑같이 들었던 말이었다. 펌을 한 모양이나 하지 않은 모양이나 결과는 비슷할 거예요. 하시며 그때도 선생님은 커트만 해주셨지. 처음 마주한 고객이 펌을 요구하는데도 극구 말리던 분. 낭랑한 목소리로 나도 잘 모르던 내 머리카락에 대해 소신껏 이야기하던 분. 그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대신 볼륨감이 잘 살도록 선생님은 꽤 오랫동안, 세심하게 커트를 해주셨다. 덕분에 비용도 아끼고, 머릿결도 더 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미용실을 나섰던 기억이 났다.



사각거리는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길이 계속 선생님의 손에 머물렀다. 머리카락 자르는 일에 몰입한 듯 그녀는 말이 없었다. 대신 1초에 두 번꼴로 가위 날이 부딪히며 경쾌한 리듬을 만들었다. 싹둑싹둑, '내 머리카락이 무참히 잘리고 있구나' 보다는 스르르 스르륵, 부드럽게 다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커트만 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내 머리카락이, 나 자신이 상대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을 바라보며, 커트 이후의 머리 모양은 둘째치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녀가 가위로 머리카락을 다루는 솜씨는 어떤 숙련의 시간을 거쳤기에 이토록 자연스럽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가위질하시느라 손 아프지 않으세요?"


커트가 마무리되고 선생님께 물었다. 가끔씩 종이 자를 일이 있을 때 가위질 몇 번만으로도 손가락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요, 아니요. 괜찮아요. 나름 손가락 근육이 발달되어 있거든요."


선생님은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답하셨다. 그제야 우리는 서로 눈을 맞추고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낯선 손님을 상대로 머리를 자르는 일이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숙련된 기술이라도 매 번 실전 무대에서 펼치려면 긴장될 텐데. 그녀도 가위질이 익숙해질 때까지 홀로 서툴고 고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시간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낸 이의 모습이 마음속으로 그려졌다. 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여다본 타인의 삶에 마술은 없었다.



일상은 반복의 연속이다. 엄마이자 주부로 살아가는 일도 그러하다. 집이라는 생활의 틀 속에서 같은 모양의 일들이 날마다 되풀이된다. 결혼하고서 식사 준비나 청소, 빨래 같은 일은 몸에 익지 않아 한동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숱한 시행과 착오의 반복. 그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나 역시 오랜 시간 반복을 거치며 '생활 근육'을 단련한 덕분이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때로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일 만큼 집안일은 서서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무언가 반복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가. 그렇다면 목표를 이룬다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버겁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일찍 일어나거나 잠드는 일, 몸에 좋은 식재료로 끼니를 챙겨 먹는 일, 정한 시간에 운동하는 일, 다정한 어투로 아이들을 대하는 일... 여전히 키워가야 할 삶의 근육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이 났다. 마음이 겸손해졌다.  



그러고 보니 '반복'이란 단어 앞에 수식어부터 바꿔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루한'이나 '따분한' 대신 '고마운'이나 '절실한' 같은 형용사로. 반복이 쌓여 습관을 이루고, 좋은 습관들이 모여 결국 내가 지향하는 '나'를 만들테니 말이다. 그렇게 반복으로 온전해지는 하루를 기대하자고, 그런 하루를 사랑하는 마음부터 근육처럼 키우자고 다짐한다.



당장, 짧게 잘라 변화를 준 머리카락부터 잘 관리하고 아껴줘야겠다. 그러려면 단백질 음식도 매일 챙겨 먹고 모자나 양산도 귀찮아말고 써야겠지. 미용실을 나서며 떠오른, 나를 위한 기특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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