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은 지금도 가끔 아주 다정하게 다녀간다
햇살이 은근히 스며드는 오후였다.
북카페 창가에 앉아, 레모네이드를 천천히 마셨다.
잔 위로 맺히는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시간도 그 속도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선 오래전부터 예정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 컵을 쥔 채,
창밖으로 고요히 흔들리는 초록 잎들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잎사귀를 따라 미끄러지며
부드럽게 반짝였다.
바깥 풍경은 그 자체로 평온한 위로였다.
문득 생각했다.
마음은 언제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가.
기억은, 늘 그 마음이 머물던 계절에 닿아 있다.
그해, 그 여름이었다.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잘될 것 같아.
느낌이 와. 지금 아니면 안 돼.”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 사회로 나섰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세상은 아직 멀고도 막막했지만,
그 마음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를 틀렸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건 분명,
그때 나를 움직이게 만든 진심이었다.
요즘도 가끔,
누군가 그런 눈빛을 보일 때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도, 그랬었지.’
확신은 때로 든든한 동력이 된다.
나도 그 확신 하나로 걸었었고,
꽤 먼 길까지도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스쳐 지나왔는지는
한참을 돌아서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말, 마음, 주장, 기다림, 침묵.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말로 다 전해지지 않았던 ‘따뜻한 결’.
나는 너무 늦게서야 그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무엇이 부족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외면하고 있었는가’를 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다시 조심스레 걸을 수 있게 되었던 건
말없이 나를 감싸주던 일상의 숨결들 덕분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고양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괜찮아요?”라고 묻는 듯한 눈빛.
서류를 잘못 냈는데도,
말없이 웃어주던 창구 직원의 미소.
그날, 비와 음악과 공간이 한꺼번에
내 마음을 다독였던 순간.
그 풍경들은 모두
마치 마음으로 쓴 한 문장 같았다.
기억은 그렇게, 문장처럼 차곡차곡 이어졌다.
“이건 날아가지 않아.”
그 말과 함께 건넸던 아이스크림,
참외 한 통에 담겨 있던 계절의 온기,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고양이의 짧은 인사.
그런 순간들이
잊고 지냈던 감각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되살려 주었다.
확신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확신이 오래가려면,
일상 속에서 건네지는 다정함과 사소한 온기들을
함께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계산과 열정,
그 너머에 머물러 있던 작고 진한 감정들.
그것들이 결국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다.
언젠가 나는 그것을 외면했고,
지금은 그것이 내 안에 스며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문득 오늘은,
그해, 그 여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그 마음을 꺼내본다.
그 마음은 지금도,
가끔 아주 다정하게 내 안을 다녀간다.
그러던 찰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말없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눈빛 속에서
잠시 예전의 나를 보았다.
확신과 온기가 다시 서로를 알아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