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참외 하나와 그날 하루의 온기
꼭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전통시장에 간다. 그 시간이 내겐, 도시의 소음을 잠시 벗어나는 작은 피난처이자 힐링타임이다.
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창문 사이로 스며든 빛은 초여름의 기운을 데리고 와 피부 위에서 반짝였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느긋이 시장으로 향했다. 창가에 비친 내 얼굴은 약간 들떠 있었고, 그 들뜸 속엔 오래된 추억이 섞여 있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김밥, 떡볶이, 어묵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달큰하고 매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순간, 학교 앞 분식집이 떠올랐다. 철제 의자, 낡은 테이블,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던 나의 그림자까지. 그때의 나는 아직 세상에 서툴렀지만, 그 세상 속에서 참 행복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 냄새 앞에서는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작은 접시에 김밥과 떡볶이를 담았다. 떡볶이 소스가 혀끝에 닿자 매운맛이 퍼지고, 이마엔 금세 땀이 맺혔다. 사장님이 내 얼굴을 보고 웃으며 물컵을 건넸다. “오늘 더우시죠? 시원하게 드세요~” 그 한마디에 마음이 덩달아 시원해졌다. 그냥 건넨 인사 같았지만, 그 속엔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튀김도 맛있어 보여 그건 따로 포장해 두었다.
오늘 저녁, 조용히 식탁을 마주할 때 방금 전의 시장 냄새가 다시 떠오를지도 몰라서.
시장 끝자락의 과일가게에 들렀다. 노란 참외들이 햇빛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참외를 하나하나 살펴보던 내 모습을 본 아저씨가 말했다. “오늘처럼 더운 날엔, 참외 하나쯤 더 있어야죠.” 그 말과 함께, 참외 하나를 봉지 위에 얹어 주었다.
그 말이 괜히 좋았다. 그렇게 달콤한 참외 하나를 더 받는 날이 내 하루 어딘가에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인생이란, 어쩌면 그런 ‘덤의 순간’으로 조용히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시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래서 시장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와야 해.”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창밖 풍경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햇살이 고층 빌딩 사이로 흩어지고, 에어컨 바람이 얼굴과 목덜미를 식혔다. 참외 봉지의 무게보다 그 안에 담긴 기분이 훨씬 가벼웠다.
택시가 집 앞에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천천히 층수를 오르는 동안 시장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복도 한가운데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하얀 털, 맑은 눈빛. 그 시선은 마치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너, 어디서 왔어?” 그 말을 하자, 예전에 복도에서 마주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고양이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따뜻했다.
고양이는 꼬리를 가볍게 흔들며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라왔다. 현관 앞에 다다라 문을 열려는 찰나, 그 녀석은 내 앞을 스치더니 복도 끝, 살짝 열린 문틈으로 사라졌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기 전, 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빈 복도에 잔잔한 빛이 스며 있었고, 그 안에는 방금 전의 고양이 시선이 남아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오늘이라는 하루를 선명하게 완성해 주었다. 햇살, 냄새, 한마디의 인사, 그리고 고양이의 눈빛— 그 모든 게 어쩐지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삶이란, 이렇게 이어지는 사소한 다정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웃음, 덤으로 받은 참외 하나, 그리고 말없이 건네는 시선 하나. 그 작은 것들이 내 하루를 조용히 빛나게 한다.
오늘의 시장은 이미 멀어졌지만, 그 따뜻한 순간만은 내 마음 안에서 아직도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