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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1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18화

구청에 대한 믿음과 첫 민원

by bluedragonK

고시원 방 안은 오후 햇살이 벽을 비스듬히 타고 흐르는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재하는 낡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는 아버지가 정리해 둔 문서들과,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내려받은 집합건물법 조문이 켜져 있었다. 활자 하나하나가 선명했지만, 눈은 점점 무거워졌다. 법률 문장 안에서 그는 숫자와 조항이 아니라 아버지의 고단한 호흡과 체념 섞인 땀방울을 읽고 있었다.

며칠 전 통화가 다시금 귓가를 파고들었다.

세 번이나 보낸 내용증명은 모두 ‘수취 거부’.
법적으로는 기록이 남았지만, 그 거부 행위는 조롱처럼 보였다.
마치 “받아봤자 소용없다”는 무언의 선언 같았다.

“법이 있는데 왜 아무도 지키지 않는 거지?”
그 질문은 재하의 마음 한복판을 후벼팠다.

아버지는 담담했지만 단호했다.

“이건 단순한 거부가 아니다. 의도적인 방해다.
하지만 기록이 남는 이상, 결국 우리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지.”

그 말은 체념이 아니라, 다시 싸우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재하는 그날 밤부터 스스로 다짐했다.
“이번엔 아버지를 혼자 두지 않겠다.”

그 결심의 연장선에서, 두 사람은 구청 민원이라는 새로운 전선을 선택했다.
더는 관리사무소를 설득하거나 감정으로 맞설 단계가 아니었다.
이제는 행정의 문으로, 제도의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날은 2023년 9월, 흐린 오후였다.
치킨집 조리대 위엔 서류 더미와 볼펜, 낡은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창문 너머엔 비가 내릴 듯한 잿빛 하늘이 얇게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결심하듯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 상대가 받았다.

“네, 도시관리국 건축과입니다. 담당 주무관입니다.”

그 평범한 인사말이, 오늘만큼은 유난히 차갑게 들렸다.

아버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제가 0000년 0월부터 ○○오피스텔 상가에서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그런데 관리사무소에서 전기세와 수도세를 지나치게 많이 부과하기 시작했어요.
이전 3층 상가에서는 개별 한전 계량기를 사용했지만,
이 건물은 공동 계량기 기반으로 사용량을 산정하더군요.
이상해서 확인을 요구했지만, 관리소는 ‘나오는 대로 측정한다’며 회피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수개월의 억울함이 진득하게 스며 있었다.

“0000년 00월부터는 사용량을 매달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0000년 0월, 다른 주무관에게 이미 관리인 선임 여부를 확인한 적 있습니다.
집합건물법 제24조, 제26조에 따라 관리인 선임과 분담금액 등본 교부가 있어야 하지만
관리사무소는 이를 전면 거부했습니다.
귀청에서 행정지도를 내려도,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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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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