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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개굴 Apr 07. 2021

애를 낳는 건 괜찮은데, 키우는 게 안 괜찮아

대신 키워줄 게 아니라면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한국에서 애를 낳는다는 것은 모든 경쟁의 끝판왕에 도전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의 양육은 경쟁으로 시작해서 끝없는 경쟁들로 이어진다. 


아이가 태어나고 유치원 가기 전까지는 뭐 그래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큰 힘듦 없이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유치원에 가면서부터, 아니 영어 유치원을 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부터 아이는 남들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만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는 세상에 들어간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조건 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을 충분히 배우기도 전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하고 더 똑똑하고 더 빛나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압력을 받는다. 

아이들의 삶은 끝없는 경쟁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절망하고 분노하고 화를 내 봐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에 수그리고 사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안 보고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지만, 다른 사람 말 신경 안 쓰고 애를 키우는 것은 그것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어렵다. 아이도 경쟁에 내몰리지만, 사실 부모도 경쟁을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은 나, 나의 가족과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의 배타적인 구별이 확실하면서도, 또 좁고 좁은 사회이니만큼 끝없는 비교가 이어진다. 내가 내 친구보다 좀 뒤처질 수는 있는데, 내 애가 다른 애보다 뒤처지는 건 못 보는 게 한국 부모이다. 누군가 내 아이보다 조금 더 뛰어난 부분을 보이는 아이를 가진 부모, 혹은 이미 양육의 경험이 더 많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오지랖이 넓은 간섭을 했을 경우 그 말들을 무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이는 나의 분신이 된다. 

나와 아이를 따로 구분해서 각자의 개체로 인식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힘들까. 



내가 아이의 삶을 구분 지어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치자.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이의 문제를 나의 문제와 동일시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탓을 하는데, 나 혼자 내 탓 아니오 하고 지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애가 잘 못되면 그것은 엄마 탓이다. 그리고 애가 잘 되면 그것도 엄마 탓이다. 나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아니 그 이상으로 애의 삶에 대해서 2중의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를 대하고 소중히 키우는 것은 분명 의무가 맞다. 하지만 아이의 선택과 삶이 부모와 '동일시'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강제로 동일시시켜버리는 한국에서 애를 키우는 것은 정말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은, 그게 내가 배 아파 낳은 자녀일지라도 내 맘대로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게 정상인데, 그 정상을 유지하는 게 너무나 힘든 나라다. 








한국에서의 양육은 한 가정에서 아이의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적,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 소모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이가 자라나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지지기반이 선진국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하다. 돈이 없어 일을 쉴 수도 없는데, 조부모가 양육을 도와줄 수도 없다면? 아이를 안 낳는 것 말고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뭐 어쩌란 말인가. 오로지 한 가정 내의 돈와 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그게 여유 있을 만한 집은 많지 않다. 



빚을 내듯, 아니 실제로 빚을 내서 애를 보게 된다. 여유가 없으니 과도하게 무리를 해야지만 양육이 가능하다. 어른 시기를 준비하는 청소년기와 사회 초년 생기를 거쳐 드디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는데, 또 그 이상의 부담을 지고 끝없이 과도한 노동과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아이를 길러야 한다. 아이를 기르는 것이 꼭 이렇게까지 무리해야만 하는 일일까? 유난히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부담이 오로지 부모의 몫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는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 아이들의 독립은 점점 늦어지고 있고, 부모는 계속해서 아이에게 경제적 지지를 해줘야 한다. 단순히 어린 시절, 청소년기에만 돈이 들던 과거와는 다르다. 다 커서 결혼을 한 자녀에게도 어느 정도의 돈을 주지 않으면 집을 아예 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다 퍼주고 나면, 이제 부모는 퇴직을 할 나이가 되었고 돈을 벌지 못하며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병원 신세도 져야 하고 들어갈 돈이 많다. 아이들에게 수많은 돈을 쏟아붓고 난 뒤, 그 이후의 노후는 누가 책임질까. 사회가? 








게다가 여성이 사회적으로 한참 활동할 나이에 애를 낳게 되면 경력단절이 되어버린다. 

회사에서는 임신할, 임신 중인, 그리고 애를 가진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다. 사실 회사의 입장도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닌 게, 사회에서 지지해 주는 것은 없으면서 회사에 의무만 강요하기 때문이다. 임신한 여성도 그 여성을 고용한 회사도 모두 손해를 보게 만드니, 사회인인 여성이 엄마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일을 하면서도 경제적으로 한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 않은데, 그 일조차도 맘껏 할 수도 없는 구조다. 도대체 뭘 어쩌라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난감하다. 한 사람이 성장해서 학력과 경력을 쌓아 사회인으로서 이제 막 제대로 역할을 하기 시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것을 관두고 육아에 에너지를 써야 한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공부하고 노력해서 취직하고 일했는지 그냥 애를 낳고 키우려고 그 모든 것을 한 건지 허무해진다.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는 아이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 해주기 어렵다. 현재 부의 양극화는 너무나 심하고,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정말 너무 슬프지만, 너무 화가 나지만 금수저도 흙수저라는 말이 계속 통용된다는 건, 그것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실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마냥 행복하고 마냥 미래의 꿈에 부풀어 있나? 지금 젊은 세대는 가장 스펙이 많지만 가장 취직이 어려우며 가장 내 집 마련을 하기 어려운 세대다. 내 자녀 세대에는 그게 더 극심하게 양극화된다면? 흙수저는 그 양극화에서 나쁜 쪽으로 극단화된 삶을 물려주게 될 수도 있는데, 이는 괜찮은 걸까? 



내가 노력하고 나의 아이가 노력하면 중간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나? 이런 의문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애를 낳아 기르는 것, 그리고 그 아이에게 삶을 선물해주는 것.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부여해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다. 



그런데 그런 현실에서 나라를 위해서 애를 낳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국방의 의무, 세금의 의무를 모두 다 하고 있는 데 왜 나라를 위해 애를 낳아야 하나?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삶은 얼마든지 희생되어도 상관없는가? 의무라면 나라가 어느 정도 그에 대한 지지를 해줘야 한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내가 내 돈으로 군복을 사 입고, 총을 알아보고, 총 쏘는 법을 내가 알아서 배우고, 내가 알아서 훈련받는가? 의무라는 말을 쓰려면 그 의무를 다 할 수 있게 서포트를 해줘야 한다. 그냥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오로지 한 개인과 한 가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양육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데 그걸 나라를 위해서 해야 한다고 물으면 정말 어이가 없다. 



내가 있고 그다음 나라가 있다. 

나라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사회 지리적 공동체이다. 사람이 먼저 생겼고, 그다음 나라가 만들어졌다. 나라가 먼저 있었고 그 나라를 위해 사람이 태어난 게 아니다. 


게다가 내가 어떠한 나라를 선택할 수 없었다. 이는 태어나자마자 부여되어버린 국적이다. 태어나고자 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는데, 이 곳에서 태어나는 우연을 이유로 내 삶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시기를 모두 헌신하여 국가를 위해 아이를 길러야 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 내가 나라로부터 얻은 이득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희생을 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번 글은 스스로 쓰면서도 서글퍼지는 내용이다. 사실 필자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 사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직업도 아이들과 관련된 일을 한다. 100% 모든 부분이 적성에 맞거나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 일을 지속하는 데 있어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아이들의 귀엽고 활발한 모습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가진 다는 것에 대해 의문이나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 관련된 일을 하고 부모들의 삶을 직접 마주하면서, 오히려 아이의 당장 귀엽고 깜찍한 모습 뒤에 부모들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더 내가 임신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고 자꾸만 미루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안을 파고들수록,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보다 보이지 않는 고군분투가 너무 많았다는 것.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진실에 다가갈수록 더 부담을 느끼게 되는 현실이 슬프다.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와 부모가 모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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