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하는 퇴사
나의 첫 사수의 퇴사 소식을 듣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던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인사팀으로 직행했다. 인력 운영 담당자에게 면담 신청을 하고 '조직이 겨우 이런 식으로 우리를 대하는 것이냐.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니들은 뭘 한 것이냐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엄연한 선배님 앞이었지만 앞뒤 안 가리고 소위 미x년처럼 마구잡이로 퍼부었다. 당신들 실수하는 거라고. 정말 큰 실수하는 거라고. 이런 상황이 오도록 내버려 둔 니들도 결국 다 똑같다며. 두보고라고. 조만간 나도 퇴사하겠다며 엄포를 놓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고작 나보다 6개월 먼저 입사했다는 이유로 동갑내기지만 야망 쟁이에 뭐 하나 평범하지 않았던 나를 본인의 첫 후배로 받아야 했던 그녀. 경쟁에서 밀려 어쩔 수 없이 이 팀으로 오게 된 나와는 다르게 교육생 때 1등을 하고 바로 이 신사업팀에 자원했다는 그녀. 분명 나이는 같았지만 한참 철없었던 나를 어르고 달래 가며 일을 가르쳐주고, 그 와중에 내가 조직에서 엇나가지 않게 선임으로 내 멘탈 케어까지 담당해야 했던 나의 첫 사수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냥 속 좋은 사람이 아니라 매우 똑똑하고 유능했다. 그냥 내버려 뒀다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크게 성장해 조직에서 긴히 쓰일 외유내강형 인재였다. 우리 팀이 부서지고 옆 팀과 통합되는 과정에서 그녀 역시 아직 사원이었기에 분명히 나처럼 통합된 팀의 기존 사업에 편입되어 새로운 업무를 배울 기회가 충분했음에도, 그녀는 우리가 본래 하던 사업을 마지막까지 선배들을 도와 정리하는 길을 택했다. 사업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정리되는 과정은 지난했고, 그 과정에 사업 실패에 대한 조직의 비난과 사입한 재고 문제로 말단 사원이었지만 선배들과 감사실에도 불려 다녔던 그녀는 분명히 말도 못 할 고초를 겪었지만 나와 다른 후배들에게는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사업이 완전히 정리되자, 이미 통합된 조직에 실낱 같은 뿌리라도 내린 나와 후배와 다르게 내 첫 사수가 팀 내 새로 파고들 자리는 없었다. 다른 팀으로 전배 가야 할 상황에,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를 어떻게든 새로운 조직에서 자리 잡히려고 노력했던 전 팀장, a.k.a. 통합된 팀의 현 팀장님께서 아까운 인재였던 그녀를 이러저러 핑계를 대며 다른 팀으로 재배치하려는 인사팀과 맞섰다. 때마침 운 좋게 파트 선임 한 분이 개인적인 사유로 퇴사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같은 파트 선후배가 되었다.
나와 같이 그녀 역시 카테고리 MD라는 새로운 일을 근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적성이나 성향에도 그리 맞지 않는 것 같았으나 이미 신사업 팀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런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빠르게 일을 배웠고 곧잘 성과를 냈다. 나 역시 그간 1호 후배를 떠나보내며 나름대로 각성했던(?)지라 그다음에 들어온 후배들과 똘똘 뭉쳐 일했고, 명석하고 사려 깊은 내 첫 사수도 파트 내 선임으로 있으니 조직 내 거칠 것이 없었다. 우리 파트는 파트장 한 분을 제외하고 모두 사원, 대리급, 고작 2~3년 차 주니어 MD들로 구성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에 기라성 같은 선배들로 구성된 조직들을 제치고 단숨에 사업부 내 최고 실적을 달성하는 루키로 성장했다.
그러나 호시절도 잠시. 병아리 사원때부터 믿고 의지하던 팀장님이 승진하셔서 다른 조직의 사업부장으로 이동하게 되셨다. 그 대신 평판이 좋지 않았던 옆 팀 팀장님 우리 팀으로 오면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우리와 다른 채널에서 MD 생활을 했던 새로운 리더는 그가 경험했던 채널과 전혀 속성이 다른 우리 채널의 생태계를 전혀 몰랐다. 아무리 유통사가 갑, 협력사가 을이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MD들에게 상도에 맞지 않는 무리한 업무 지시를 내렸고, 개인의 사욕을 위해 조직의 자원을 부당하게 이용했다. 팀원들과 소통도 전혀 되지 않았고 자신만의 논리를 내세웠으며, 기본적인 업무 매너도 없고 무례했다. 과거부터 수족처럼 부렸던 부장님 한 분을 갑자기 데려와 모든 파트장 위에 선임 파트장으로 앉히는 기행을 저지르며 오직 그와만 조직의 운영 방식과 그룹 전략 등 중요한 정보들을 독점하며 밀실에서 속삭였다.
혈기왕성할 때고 '이 회사 그만둬도 나 하나 갈 곳 없을까.'라는 배짱과, 업무 능력까지 한창 인정받고 있었을 때였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MD는 매출로 인정받는 거라는 전 팀장님의 가르침으로 악착같이 목표 대비 매출 120~130% 초과 달성을 하며, 동시에 이익까지 내고 있던 나는 내 목소리를 내는데 거침이 없었고 사사건건 새 팀장과 충돌했다. 결국 눈에 가시였는지 나는 그 해 당연하리라 생각했던 진급에서 누락되었고, 지원팀으로 강제 발령이 났다. 그는 내친김에 우리 파트를 모두 물갈이하려고 그랬는지 나의 첫 사수를 다른 파트로 넘겨 전혀 다른 일을 맡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밑에 후배들도 하나 둘 본인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지원조직으로 속속 강제 발령이 났다.
진급도 누락되고, 잘 나가던 메인 MD에서 하루아침에 후배 MD들을 서포트해야 하는 지원 조직으로 방출된 나는 모욕감에 수치심에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명목상으로는 각 팀에서 1명씩 차출해서 지원 조직으로 보낸 것이라 했지만 실상은 각 팀마다 성과가 부진한 연차 높은 부장들과 초대졸 출신의 사원들로 구성된 새로운 팀에 공채 출신은 달랑 나 하나였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지만 그 당시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발령 다음 날 바로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이 조직 내 일파만파 소문이 나자, 참 감사하게도 그간 나를 아꼈던 조직장, 선배들이 발 벗고 나섰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단은 참고 제발 출근만 하라며 나를 챙겼다.
나는 내가 제일 불이익을 많이 당하고,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하루아침에 다른 파트에 막내급으로 넘겨져 그 파트에서 제일 손이 많이 가고 짜치는 신입 사원이나 할 법한 업무를 폭탄처럼 투하받은 내 첫 사수도 회사가 지옥이긴 매한 가지였다. 이미 내 사수가 명민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내 사수를 지나치게 경계했고, 그녀에게 파트 내 메인 업무가 아닌 실속 없고 품만 많이 가는 일들을 도맡아 맡겼다. 동해로 서해로 하루 걸러 출장을 다니며 눈에 띄게 야위어 가던 그녀였지만 내 사수는 나처럼 이건 불합리하다고 화내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소처럼 묵묵히 주어진 일들을 처리했지만 방출된 나와 달리 여전히 상도덕에 어긋나는 업무 지시를 내리는 폭군 같은 팀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리여리한 외모와 달리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조용히 강단 있게 밀어붙이던 그녀의 성격상, 퇴사에 관해서도 전혀 회사와 타협하지 않았다. 퇴사를 만류하는 그 어떤 회유책과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돼서야 선후배들에게 조용히 자신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며,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 말했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동요할까 봐 차마 먼저 말하지 못했다는 나의 첫 사수의 마지막 배려에 '어쩌다 우리가 이지경이 되었는가.' 하루아침에 뿔뿔이 흩어졌고,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을 만든 주동자인 팀장에 대한 분노와 그런 사람을 리더로 앉힌 조직, 결국 유능한 인재가 끝내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기까지 이 상황을 수수방관한 회사 시스템에 분노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사수는 5년 만에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평소에 나를 탐내던 새로운 팀으로 초고속 후속 발령이 났고, 내 인생의 최악의 팀장 중 하나였던 그는 감사를 받다가 석연치 않은 모습으로 퇴사했다.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그녀를 1년에 두어 번은 꼬박꼬박 만난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워낙 힘든 시간을 전우처럼 보내서 그런지 만날 때마다 어제 본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고 친근하다. 지금은 말도 편하게 하며 "내가 첫 후배라 힘들었지?"라고 하면 "알면서 뭘 물어"라며 손사래 치는 그녀가 내 첫 사수여서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참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