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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Aug 21. 2020

상무님의 야반도주 퇴사

남들 다 하는 퇴사

 출근해보니 상무님 방이 말끔히 비어 있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 집무실이 마치 언제 방 주인이 있었냐는 듯 덩그러니 사무 집기만 놓여 있다. 주변 동료들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니 지난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잠시 들러 짐을 챙겨 떠나신 것 같다고 했다. 작별 인사나 형식적인 퇴직 인사 메일도 없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본 직원들이 거의 없다. 우리들은 이 같은 퇴사를 일명 '야반도주 퇴사'라고 불렀다. 의외로 몇 년에 한 번 꼴로, 잊을 만하면 여지없이 꼭 야반도주 퇴사를 목도한다.


 그런 퇴사의 장본인이 나의 직속상관이었을 때도 있고, 다른 조직의 수장일 때도 있었다. 전 직장은 평사원들은 파티션도 없이 주르륵 일렬로 앉아 근무시켰지만, 상무 이상의 임원들에게는 투명 유리벽으로 둘러 쌓인 집무실을 별도로 따로 내줬다. 그래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밖에서 오며 가며 훤히 알 수 있어 방 주인들의 야반도주 퇴사는 금방 눈에 잘 띄었다.


 임원들의 퇴직 사유는 대체로 비슷했다. 본인 휘하 조직의 성과 부진으로 수장으로서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경우가 제일 흔했다. 그래도 그런 경우는 어쨌든 그동안 자기 밑에 있던 부하들과 유관 부서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 겸 악수라도 청하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수고 많았어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가볍게 악수하며 떠나던 그분들의 마지막 뒷모습은 때론 쓸쓸해 보였지만, 적어도 부끄러워 보이진 않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성과가 부진한 이유가 온전히 그들 탓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운이 나쁘게 최악의 시장 상황을 마주했거나, 꼬꼬마인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내 으른들의 정치 싸움에서 패해 보이콧 당했다는 것을.



 반면 야반도주 퇴사한 임원들은 달랐다. 대부분 떳떳하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조직을 떠났다. 부하 직원들과 성희롱, 성추행 문제가 있었거나, 거래하는 업체들에게 대가성 접대 혹은 뒷돈을 받았거나, 그도 아니면 조직과 본인의 위치를 이용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웠다거나. 대부분 남들에게 퇴직 사유로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운 케이스들이다. 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공식 상견례 자리든 환영 회식에서든 제일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개 좀도둑처럼 야밤에 아무도 몰래 짐을 챙겨 꽁지 빠지게 사라졌다는 사실을 볼 때마다 의외로 '쌤통이다. 꼴좋다.'라는 마음보다 어딘지 뒷 맛이 개운치 못하고 텁텁했다.


 저럴 것을. 저렇게 떠날 것을 그동안 왜 그렇게 아랫사람들을 달달 볶으며 괴롭혔을까. 뿌듯할까? 기왕지사 높은 자리에서 크게 한 탕 해 먹고 떠나니 속이 시원하고 기분 좋을까? 궁금했다. 다른 자리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또 해 먹거나 자기 멋대로 하면 되니까 괜찮을까? 그들은 좀도둑이 아니라 대도니까 우리 같은 밑바닥에 딱 붙어 있는 평사원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전혀 상관없을까? 모르겠다.


 추문이나 비리 같은 이유가 아니라 단순히 성과 부진을 책임으로 조직을 떠나는 임원 중에도 유독 자존심이 강하신 분들은 꼭 야반도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리 없이, 조용히 집무실을 비우셨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아랫사람들 보기가 면구스럽고 부끄러워서 그랬을 테지만 그래도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없이 그림자처럼 쓱 사라지는 모습이 못내 서운하기도 좀 야속하기도 했다. 아무튼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퇴직 인사 메일 하나를 받았다. 발신자는 신입 사원으로 입사 해 무려 20년이 넘도록 근속하시다 퇴직하시는 임원분이셨다. 나는 한 번도 그분 밑에 있지도 않았고, 그분 조직원들과 협업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평직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임원들은 대게 그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편이라 이름만은 친숙한 분이었다. 그분 역시 최근 맡았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휘하의 조직도 없어지고 본인도 조직을 떠나는 경우였다.


 꾹꾹 진심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한 메일에는 한 창 꿈 많고 패기 넘치는 청년으로 들어와 어느덧 머리도 많이 빠지고 반백이 되어 나가게 되었다며. 그동안 참 많은 추억을 쌓았고 동료들과, 선후배들과 참 즐거웠다고. 회사와 함께 본인도 많이 성장했고, 많은 것들을 누렸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월급쟁이로 참 많은 오욕의 세월을 버티며 상처도 많이 받고 힘들었다고. 그러다 이렇게 훌쩍 떠나게 되어 섭섭한 마음도 들지만 한 편으로는 참 홀가분하다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앞으로 더 힘든 상황에 남겨질 후배들이 참 안쓰럽고 걱정된다고. 선배로서 더 좋은 회사를 만들고 떠나지 못하는 것 같아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단체 메일 발송 과정에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까지 어쩌다 도달한 메일이었지만, 메일 내용을 읽는 내내 가슴이 한편이 먹먹해지고 울컥했다. 임원이길 앞서 그들은 엄연한 조직 내 나의 선배들이었다. 밤사이 야반도주 하든, 그림자처럼 사라지든 그래도 평사원들의 로망이라는,   명중의 겨우   나온다는 조직의 . 임원 자리까지 올라간 선배들의 품격 없는 말로에 조금씩 실망하고 지쳐 있던 내게 그분의 퇴직 인사 메일은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정작 차 한 잔, 말씀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분이지만 선배로서 남겨진 후배인 나에게 누구보다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멋지게 떠난 분으로 기억됐다.


 부디 어디에서든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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