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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Jul 19. 2020

대놓고 시키는 것보다 슬쩍 떠보는 상사가 더 위험하다.

남의 집 귀한 자식입니다.

 앞 뒤 구분 없이 무턱대고 일을 시키는 상사들이 있다. 그 일이 조직에서 무슨 의미인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또 하필이면 바로 나를(혹은 우리 파트를) 꼭 짚어서 그 일을 시키는지 이유 따위는 없다. 친절한 부연 설명을 기대하며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는 '나 할 말 다했는데 너 왜 아직 거기 있니?' 같은 눈칫밥까지 덤으로 먹는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속된 말로 '윗사람이 까라면 까라' 같은 사고방식의 업무 통보들.


 혈기 왕성한 조무래기 사원 시절에는 오히려 그런 무자비한 업무 지시에 매우 강하게 분노했다. 적극적으로 티 나게 반발심을 표했으며, 내 입장에서 도저히 맥락이 이해되지도 않고, 내 업무와 팀의 일과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들을 끝까지 하지 않고 버티다(개기다) 결국 상사의 눈 밖에 나기도 했다. 그런 뾰족한 기운이 선배들에게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후배로 여겨지기도 했도, 역설적으로 나보다 연차가 낮은 후배들에게는 오히려 잔다르크로 추앙받으며 인기몰이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차라리 그렇게 막무가내로 업무 지시하는 상사들이 오히려 속편하다. 적어도 그들은 본인들 직접 지시한 일이니, 애초에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발생해도 결국 그 책임까지 대부분 본인들이 짊어졌으니까.


 물론 뻔뻔하게 '본인은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 혹은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라고 안면 몰수하고 말을 바꾸는 최악의 인물들이 간혹 나타나긴 했지만 대기업들의 서슬 퍼런 감사 제도 앞에 본격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릴라치면 금세 거짓이 탄로 났다. 간혹 운 좋게 책임을 피해도 대부분 조직원들이 암묵적으로 쉬쉬하며 그런 부류의 리더들을 교묘히 피했고, 결국 그들은 조직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무대포형 상사들은 대부분 단순했다.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느닷없이 신임 리더가 회의실로 불러 가보니 평소 싸가지에 냉혈한으로 소문이 자자한 그가 따뜻한 커피까지 손수 준비해 놓고 이야기 좀 하자는 것이 아닌가. 눈치껏 커피를 홀짝이니 자연스럽게 본인이 평소에 몇 번 이야기를 꺼냈지만 조직원들의 거센 반발로 씨알도 안 먹히던 아이디어를 화제 삼으며 허심탄회한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순진했던 나는 '정말 순수하게' 조직원으로서 내 의견이 궁금해서 그런 줄 알고 성심성의껏 의견을 말했다.  


 정작 그의 의중은 내게 그 프로젝트를 시키고 싶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불러 떠보는 것인 줄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캐주얼한 미팅인가 싶어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들을 늘어놓다 보니 순식간에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제야 오전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초조해진 나는 이제 그만 회의실을 나가보려 했는데 정작 그는 태연히 계속 이래저래 말을 보태며 이야기를 질질 끌어갔다. '바빠 죽겠는데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그는 내가 이 프로젝트에 이런 해박한 지식과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며 돌연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묻는 게 아닌가.


 기본적으로 세상만사에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리더에게 최대한  보이고 싶었던 나는 정작  질문의 진위를 새까맣게 모른  "관심이 있는 분야긴 하죠......" 하고 매우 얼빵한 대답을 했다.  입에서  말이 나오자마자 '옳다구나!' 덫에 걸린 토끼를 보듯 까만 눈동자를 빠르게 반짝이며 그는 "그럼  프로젝트는 OO님이 관심 있어서 해보는 걸로 알겠습니다~"라고 속사포처럼 대화를 마무리하고 내게 나가보라고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자리로 돌아와 오전 내내 찜찜한 기색을 떨쳐 버릴 수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후 팀 주간 회의에서 갑자기 그는 신규 프로젝트를 내가 전담해서 추진하게 되었다고 팀 전원에게 공표해버리는 게 아닌가. 더욱 황당한 것은 내가 자원해서 그 일을 맡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해버리니 그제야 '아뿔싸, 내가 당했구나' 싶었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떠맡았던 일은 애초에 성공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프로젝트였으며, 정작 실무자인 내 의견보다는 본인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실현시킬 허수아비 손발만 필요했던 그의 의도대로 흘러갔고 결과는 쫄딱 망했다. 하지만 프로젝트 실패는 고스란히 실무자인 내 역량의 부족으로 조직 내 각인됐다.


 그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몰아가기로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나처럼 과거에 그에게 데인 적 없는 순진한 먹잇감들에게 늘 그런 식으로 일을 떠 안겼고 정작 일이 잘되면 부하직원에게 기회를 주고 독려한 본인 공으로, 실패하면 실무자 개인의 능력 탓을 돌리며 교묘히 책임을 피해 가는 야비한 인간이었다.  

 


 단순 무식하게 무대포로 일을 시키는 상사들과는 분명 결이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조직에서 더 오래 생존했고 승승장구하며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일도 잦았다. 세월이 지나 제법 머리가 굵어진 내게 과거의 그와 비슷한 새로운 리더가 등장했다. 참으로 기시감이 드는 비슷한 상황을 만들며 내 입에서 나를 옭아맬 실마리를 찾는 듯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그 앞에서 이제 나는 최대한 간결하고 짧은 대답으로 팽팽한 방어벽을 친다.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말은 모두 삼가고 여차하면 적당한 침묵으로 시간을 끌며 묵비권이 왜 최대 방어수단인지 자연스레 통감하는 요즘이다.


 그는 이래저래 떠보는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질질 끌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입에서 나를 낚아챌 실낱같은 기회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결국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분명히 결과만 놓고 보면 팽팽한 전투에서 결국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전혀 기쁘지 않고 씁쓸한 마음만 든다. 교활한 독사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어느새 나까지 그런 인간이 된 것 같아 조금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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