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귀한 자식입니다.
왜 그랬어요? 그때 우리한테 왜 그랬어요?
나와 동기들의 신입 교육과 부서 배치를 총괄했던 인사 담당자를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퇴사해 연락처나 근황조차 전혀 모르지만 길에서 우연히라도 다시 마주친다면 불러 세워 꼭 물어보고 싶다. 우리한테 그때 대체 왜 그랬냐고.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쌩 고생고생하며 통과한 우리를, 왜 그렇게 또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며 경쟁시킨 저의가 뭐냐고.
취뽀하면 그놈의 지긋지긋한 경쟁은 끝나는 줄 알았다. ‘제발 나를 선택해달라고,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면 열심히, 잘 해낼 자신이 있다고.’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불타는 의지를 내비치며 스스로를 어필했다. 그럼에도 1차 서류부터 떨어지고, 최종 면접까지 갔다가도 떨어지고. 반복되는 좌절과 낙담의 굴레 속에서 마침내 첫 직장에 합격했을 때 ‘이제 됐다. 드디어 이제 그만 됐다.’라며 안도했다. 수 천명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특출한 기술도 없던 문과생이 목표했던 기업에, 그것도 원하던 직무로 합격했으니 앞으로 꽃 길만 걸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끝은커녕 또 다른 경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자회사를 포함하여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통상 대기업 유통 계열사로 분류되는 나의 첫 직장은 나까지 총 19명을신입 사원으로 채용했다. 그 중 나를 포함 6명의 동기들이 유통사에 꽃이라는 MD로 입사했다.
MD는 회사의 성장과 매출에 막대한 공헌을 하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다. 실상은 최전방에 배치되어 무기가 없으면 손발이라도 써서라도 어떻게든 숫자 목표, 즉 매출 실적을 달성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던 우리에게, 조직은 6개월이라는 꽤 긴 교육 기간을 할애했다.
교육기간 동안의 평가 결과에 따라 부서가 정해진다고 했다. 1등 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부서에 갈 수 있고, 나머지는 본인이 희망하는 부서에 못 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한 달 동안 그룹 연수원에서 동거 동락하며 한껏 친해진 6명 동기들 사이에서 그때부터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당시 조직에는 매출의 대부분을 커버하는 메인 채널과, 규모는 작았지만 앞으로 큰 성장이 예상되는 성장 채널과 마지막으로 과거에 흥했지만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 전통 채널이 존재했다. MD들은 우선 3개 중 하나의 채널로 배치되고, 그 안에서 또다시 패션/뷰티/식품/리빙/유아동/생활/디지털/여행 등 본인이 담당할 분야, 일명 ‘카테고리’를 배치받는 시스템이었다.
각 채널별로 엄연히 장단점이 존재했지만 소위 ‘매출이 인격이라는’ 유통사에서 매출 규모가 가장 큰 메인 채널의 MD들의 위상은 남달랐다. 메인 채널의 선배MD들은 어디서든 목소리가 컸고 태도 역시 거리낌이 없었다. 그 중 상당수가 억대 인센티브를 받는다는 전설 같은 풍문까지 더해져 신입 MD였던 우리는 대부분 메인 채널로 배치받길 희망했다.
물론 빛이 환하면 어둠도 짙다. 메인 채널 MD는 엄청난 보상과 견고한 지위를 지니는 만큼 스트레스 레벨도 높고 경쟁도 치열했다. 하지만 스트레스 안 받는 팀이 어디 있나? 이왕이면 조직 내 주류가 되고 싶었다. 돈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에 나는 당연히 메인 채널로 배치되길 원했다. 다른 채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머지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앞으로 사양될 것이 뻔해 보이는 전통 채널에 배치되면 미련 없이 퇴사하겠다며 다들 언성을 높였다.
서로 목표하는 바가 같으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채널이 메인 채널에 배치된다해도 혹여 내가 전혀 관심 없는 식품이나 생활, 가전 같은 카테고리에 배치되는 건 싫었다. 어릴 때부터 관심 많았던 패션이나 뷰티 카테고리에 가고 싶었다. 동기들은 ‘채널이 우선 vs 카테고리가 우선’ 이냐는 고민에 빠졌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일에 호불호가 강했던 나는 평가에서 1등 해서 반드시 둘 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성취하고 말겠다고 전투력을 활활 불태웠다.
의지가 충만하기는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배치되면 앞으로 2-3년간은 팀 이동이 어렵다. 선배들은 처음에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해도 언젠가는 가게 되니 혹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라는, 정신 승리 같은 변명처럼 들렸다. 앞으로 이 조직에 천년만년 뼈를 묻을 것도 아니고 어떻게 들어온 자리인데 이왕이면 첫 단추부터 잘 꿰고 싶었다.
'물러서면 안 된다.' 모두들 한 번 주류 경쟁에서 밀리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역전의 기회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다. 꽃같은 청춘을 낭비하지 않고 조직에서 탄탄대로를 걸으려면 출발점부터 꼭 이겨서 어떻게든 원하는 결과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마음먹고 순위 경쟁을 시작하자 마치 헝거게임 출전자들처럼 남들이 짜놓은 판에서 서로 죽자고 달려들었다. 이제 경쟁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던 순진한 착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내 안에서도 독기와 생존 본능이 다시끔 꿈틀댔다. 나뿐만 아니아 또다시 무한 경쟁에 내몰린 동기들은 다들 그동안 숨겨왔던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음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