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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Sep 07. 2020

팀장님의 마지막 송사를 읽으며

남들 다하는 퇴사

 나른한 오후, 졸음을 쫓으며 한창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데 윈도우 하단에 사내 메신저 알림이 정신없이 반짝반짝거린다. 눈에 거슬려 얼른 클릭해 대화창을 띄워보니 내가 신입 사원일 때 같은 팀이었던 선배님이 갑작스럽게 내게 팀장님 마지막 송사를 부탁했다. 나의 첫 팀장님, 그녀가 다음 주면 이 회사를 떠난다. 


 회사에서 15년은 족히 넘는 근속 연수를 자랑하며 그간 조직에서 소위 '한가닥' 하셨던 나의 구. 팀장님, 현.(다른 조직) 상무님의 송별회 자리다. 분명히 조직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줄줄이 참석할 것이 뻔한데 고작 대리 나부랭이 주제에 까마득한 선배들 앞에서 감히 후배들을 대표해 송사를 낭독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괜히 한다고 했나, 이제라도 물리자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내 마음을 텔레파시로 읽었는지 송별회를 주관하는 선배가 '너 말고 한 명 더 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무를 생각도 말라'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머리털 나고 처음 써보는 송사에 대한 부담감을 '에라 모르겠다. 그냥 진심으로 쓰면 되겠지.' 싶어 워드를 켜고 더듬더듬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되던 서두도 잠시. 신입 사원 때 나의 첫 팀장님이었던 그녀와 추억들과, 웃지 못할 그간의 에피소드들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타이핑하다 보니 순식간에 A4 한 페이지가 빼곡히 채워졌다. 출력해 한 번 쭉 읽어보며 너무 격이 없거나 철없어 보이는 표현들은 수정하고 저장 버튼을 눌러 파일을 종료했다. 그제야 '아, 정말로 떠나시는구나. 마지막이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막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처음 본 존재를 엄마라고 각인하듯이 햇병아리 신입 사원이었던 내게 첫 팀장님이었던 그녀는 내 조직 생활에 내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일개 평사원으로 입사해 대기업에서 임원 자리까지 올랐던 그분은 생각할수록 참 비상한 인물이었다. 업무 성과, 끊임없는 자기 계발, 후배들을 이끄는 리더십, 조직에 대한 로열티, 마지막으로 임원 꿈나무들의 필수 역량 중 하나인 처세 능력까지, 뭐하나 뒤지지 않는 조직 생활 만랩이셨다. 그러니 기혼 여성,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도 대기업 유리천장쯤 가볍게 부시고 승승장구하셨다.  


 다른 계열사로 이동하시면서 우리 조직을 떠나는 경우라 소속이 다를 뿐, 크게 봤을 때 완전한 이별은 아니었지만 나를 포함한 수많은 후배들은 매우 아쉽고 서운했다. 그룹 전체 인력 운영 차원에서 이동이라는 사실이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요, 보호자를 하루아침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힘으로 남에게 강제로 뺏기는 것 같아 그런 결정을 한 회사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도 핵심 계열사에 좋은 자리로 이동하시는 것이니 훗날을 기약하며 웃으며 보내드려야지. 풋내기처럼 울지 말아야지 단단히 마음먹었다.


 하지만 웬걸. 개성 강한 나 때문에 팀장님이 인사팀에 불려 다닌 이야기. 일하다 사고 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혼나서 눈물 콧물 흘린 이야기. 잊을만하면 회사 때려치우겠다며, 협박에 투정 부린 이야기. 그럼 앞으로 뭐가 하고 싶냐고 하시길래 금세 눈을 반짝이며 조잘조잘 장래 꿈에 대해 말하던 이야기. 열심히 해서 우리 팀이 성과 창출상 받은 이야기. 대표님 앞에서 신사업 아이템에 대해 발표하며 팀장님 뿌듯하게 해 드린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님이 우리 팀을 떠나자 곧바로 엇나가며 승진도 누락되고 결국 팀에서 방출되기까지 한 이야기. 그 길로 회사를 박차고 나가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던 나를 어르고 달래, 내가 간헐적 천재 기질이 있다며 결국 원하는 자리로 이동해 날개를 달 수 있게 도와주신 에피소드까지.


 천둥벌거숭이 었던 나를 포기하지 않고 훈육하여 핵심 인재 언저리에, '제법 쓸만한 인재'까지 키워 낸 그녀의 노고에 대한 치하와 감사한 마음, 그런 분을 상사로 모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이었는지 그땐 도통 몰랐던 어리석음. 호랑이 스승이자 선배, 따뜻하고 지혜로운 멘토, 소탈하고 유쾌한 옆집 언니 같았던 존재를 떠나보내는 서운하고도 아쉬운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송사를 읽다가 결국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 나를 보며 하루가 멀다 하고 혼나서 반성문 쓰고,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야근하는 주제에 한결 같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기죽지 않고 할말 다하던 나를 익히 알던 선배들도 에피소드들에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그러다 결국 각자 그간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남 모르게 얽힌 개개인의 소중한 사연들이 떠오르는 듯 고깃집 냅킨으로 연신 눈가를 찍어내시는 분들도 속출했다. 결국 송사의 주인공인 장본인도 눈시울을 붉혔다. 내심 걱정했던 우려와 달리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팀장님의 따뜻한 포옹까지 받고 나의 첫 송사 경험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후에 평소 다른 조직이라 교류가 없던 분들께도 칭찬도 많이 받고 글재주가 좋다는 소리까지 덤으로 들어 한동안 기분이 솜사탕처럼 둥둥 날아갈 것 같았다. 어디로 튈지 몰랐던 문제아가 명실공히 조직 최고 인재에게 트레이닝 받은 건실한 청년으로 거듭난 나의 미담이 널리 퍼져 유명세를 타자 호의적인 손길이 쏟아졌고 다른 팀과 협업도 술술 진행됐다. 나의 멘토는  감사하게도 마지막까지 내가 조직에서  단단히 혼자   있도록 도와주고 떠나신 셈이다.



 지금 다시 파일을 불러 읽어보면 참 형편없다. 초등학생 꼬마가 담임 선생님께 보내는 어설픈 편지 수준의 문장력이지만, 삐둘삐둘한 글씨 속에 담긴 진심 때문에 칭찬받은 것 뿐이다. 그래도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내 마지막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내가 퇴사하는 날 누군가 단 1명이라도 그 날의 나처럼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슬퍼해준다면, 내 연봉이나 직급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떠나는 자리가 어떨까? 나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고민하고  고민하며  멘토의 마지막 송별회,   떠나던 모습 발치라도 따라갈  있게 되길 내내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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