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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랑 Nov 01. 2020

진짜 '빈손' 여행

유럽에서 스물 하나, 둘, 셋

캐리어를 잃어버렸다.


놀랍게도 스위스 여행 첫날 일어난 일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컨베이어벨트가 다 돌아갈때까지도 착각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진짜라고? 나 정말 스위스랑 초면인데? 처음봤는데 이래도 되는거야? 막막한 질문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캐리지 벨트 앞에 서서 장장 30분째.


인정하기로 했다.


해야만 하는 순간이었지. 당장 필요한 휴대폰 충전기부터 40일간 입어야 할 옷, 일기장, 변환 어댑터, 세면도구 ... 모조리 내 손을 떠나갔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오히려 상황에 초연해진다고.


다행히 분실된 짐을 처리하는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다. 내일이면 아마 새로 비행기가 뜰 거고, 호텔로 짐을 보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가라앉는 기분을 삼키며 서류에 싸인했다.


그런데 왜일까.


나오는 길엔 갑자기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12시간의 비행 동안 입었던 찝찝한 옷. 모자. 카메라. 휴대폰. 이어폰. 딱 그정도만 몸에 걸치고 호텔로 나아가는 길이 내내 콧노래였다.


진짜 '빈손'으로 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체크인을 끝내고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그날 오후에는 제네바 시내 구경을 나갔다.


거리에서 찍은 풍경. 셔터 누르는 곳곳이 다 장관이었다.

처음만난 스위스는 초면의 무례함치곤 너무나 평화롭고 황홀한 도시였다. 아름답다. 그런 말로도 부족한.



오후에는 시간이 남아서 브와 몽트뢰 등 레만 호를 따라 이어지는 열차를 타러 갔다. 스위스에서는 여행객들을 위한 '스위스 패스' 상품을 판매하는데, 이게 있으면 원하는 여행 일정 동안 SBB(스위스 연방열차를 비롯한 교통편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브베의 상징인 포크 조형물 앞에서



이날의 모토는 '무작정'. 무작정 내려서 지도도 안 켜고 걸어갔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충전기도 없어서 벌일 수 있는 무모한 짓이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까 더 편했다. 여행 오면 꾸미고 예쁜 사진을 남기기 바빠서 놓쳤던 풍경들에 시선을 더 길게 걸어둘 수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스스로도 나를 보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서.



이 사진을 찍을 때 즈음에 볕이 정말 좋았다. 내 앞에 서 있던 청년이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강으로 수영을 하러 들어갔다.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들을 보고 있으면 부러워진다.


이 도시를 여행하면서, 이 분위기에 속해있는 시간만큼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이런 이유로 스위스를 떠나기 전에 강에서 수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실제로도 실천했다!)


내려놓는다는 건 때로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날 하루종일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그 상태로 즐기는 여름 스위스의 볕. 말소리. 음악소리... 가만히 있어도 나를 먹고 자라는 여유와 조화로움.


너무너무 행복했다.


이 여행을 위해 삼각대도 사고 화장품도 일기장도 색연필도 입고 찍을 예쁜 옷도 샀지만 그제야 알겠더라. 내가 진짜 필요했던 건 이 홀가분함. 진짜 '빈손' 여행으로 걸어다니면서 얻는 진정한 휴식이자 여행의 의미, 여행의 즐거움이었다는 걸.

 

때론 가장 가볍게 떠난 여행이 영혼에 오래 남는 무거운 추억들을 새겨준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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