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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Jun 07. 2019

잘되면 내 덕, 잘못되면 너 탓

호주 직장 생활: 사내 정치

호주에서 나의 마지막 직책은 비즈니스 시스템 개발 부서의 리포팅 시스템 팀장이었다. 

보통 매월 열리는 아시아 태평양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는데 어느 날 매니저가 미팅 초대장을 전달하였다. 리포팅 시스템과 관련하여 브리핑할 텐데 질의시간을 대비하여 참석을 요청한 것이다.


얼마 전 호주지역에 출시한 시스템이 핫이슈였기 때문에 딱히 부담되지는 않았다. 회의 중에 조용히 일할 겸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한 시간 반에 걸친 회의 시간 동안 노트북을 쳐다볼 여유는 없었다. 이번에 출시한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해 치열하게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해결책은커녕 협조안조차 내놓지 않는 임원진들이 너무 한심해서.


CFO를 비롯하여 임원진들은 비즈니스 시스템 담당 이사와 부장에게 프로세스 측면에서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언제 해결될 것인지 30분 이상 몰아세우면서 막상 현재 가장 큰 사안인 고객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단기 솔루션에 대한 협조를 해줄 의향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 못난 드라마가 앞으로 몇 달 혹은 1년후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게 될 아시아 지역 임원진들에게 생방송되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아무말도 안하면서 그 막장드라마를 보며 서로 속닥거리며 비웃는 몇몇 이사들이었다.


친한 동료들과 회사 험담을 할 때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sinking ship이라며 어서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듣고 다른 친구는 회사에 Titanic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왜 내가 sinking ship이라고 느꼈는지 증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우리 팀이 개발한 시스템을 출시하기 위해 호주지역 재무이사와 미팅을 잡았다. 재무팀이 매뉴얼로 하던 업무를 자동화하는 시스템이었는데 프로젝트의 진척을 주기적으로 보고하였고 출시 승인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상 회의에서 그는 다른 팀 매니저들 모두에게 시스템 디자인을 확인하였는지 등 지난 4개월 동안 한 번도 제기한 적 없는 의견들을 내놓는 것이었다.


재무팀 분석가 3명이 매뉴얼로 하던 영업 월말 보고 관련이었기 때문에 시스템이 현재의 매뉴얼 보고와 동일하게 운영되면 완료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고.

그의 질문은 오히려 재무팀에게 했어야 하는 사항이었다. 질문을 풀어보면, 재무팀이 현재까지 해왔던 보고의 완전성에 대한 의심이었다.  


게다가 프로젝트 범위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실제로 불가능하더라도 이론적으로 가능한 시나리오까지 모두 테스트하길 요청했다. 이론적인 케이스까지 추가하면 300개 이상의 시나리오가 가능했다. 기능 추가는 둘째 치고,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비협조적인 재무팀이 사용자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300개 이상의 테스트를 할지, 설사 협조적으로 테스트를 한다 하더라도 최소 한 달은 지연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확고했다, 자신이 요청한 모든 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승인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한 달여 후, 관련부서들을 위한 데모 및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시스템을 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아시아 태평양 CFO가 전체 메일을 통해 아시아 지역까지 확대하길 고대한다고 했다.


얼마 후 분기마다 있는 전직원회의에서 지난 분기 프로젝트의 현재 상황과 성과 보고 중이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그 재무이사로 바뀌어 있었다. 일말의 양심이었을까? 프로젝트 리드로 내 이름을 넣었다. 친한 동료들은 분노하며 열을 올렸다. 어이는 없었지만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것도 아닌지라 그냥 비웃고 말았다.


한국이나 호주나 내가 일했던 조직은 언제나 그랬다.

대부분의 매니저들이 잘되면 나의 덕이라 하고 잘못되면 너탓이라 하더라. 


이를 위해서는 교묘한 발 넣기 빼기를 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치력이 중요하다. 정치를 잘하는 사람이 승진도 빠르고. 

딱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정말 잘하는 동료가 있었는데 1년 만에 두 단계 승진을 이뤄냈다!

이전 매니저는 그녀가 관리해야 하는 인력도 적었지만 같은 직급의 다른 매니저보다 연봉이 60% 정도 더 높았다. 그리고 그녀 덕분에 나는 다른 부서를 지원해주면서 월급에 덧붙여 보너스를 받았다. 이유인즉, 내가 이전에 일했던 부서에서 자주 지원 요청이 들어왔고 그녀는 담당 부장을 만나 지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나에게 제공하는 것을 약속받았다. 그녀의 정치력은 아마 만렙일 듯.


진급할수록 정치력은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정치를 잘하는 매니저를 가진 부서나 팀은 예산 및 인력을 더 제공받을 수 있고 팀원이 일을 추진하는데 방해되는 요소를 척척 제거해준다. 덕분에 부하직원 입장에선 업무 추진에 훨씬 수월할 수 밖에 없고 자신의 공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매니저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나의 성과는 곧 매니저의 성과가 될 수도 있다는 맹점. 

그에 반해 정치력 없는 매니저를 만나면 예산이나 인력 추가 제공은커녕 성과조차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보니 매니저에게 정치력은 필수 스킬로 보일 수 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력 제로이던 나는 마찬가지로 정치력 제로의 마지막 매니저가 좋았다 (물론 그가 베스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완전한 신뢰가.

 

‘자, 여기! 내가 바빠서 다른 학교에서 여기로 놀러 오는 것까지는 내가 막아줄 수는 없어. 하지만 이 운동장은 네가 너 팀원들이랑 맘껏 써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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