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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Jan 25. 2024

영월

외로움: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해가 이미 산을 넘어가 꼬리 빛만 남아있는 시간에 영월역에 도착했다. 철로 위 남보랏빛 하늘이 아름다워 조금 늦게 역에서 나왔다. 같이 내렸던 승객들은 모두 사라지고 어둡고 조용한 기와지붕의 영월역만 서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부모님이 즐겨 보시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가 말발굽 모양으로 물이 흐르는 멋진 경치를 보고 반해서 언젠가 영월에 가보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갈지 계획이 없는 이번 여행에 꼭 가겠다고 결심한 곳중 하나가 영월이었다. 영월은 단종의 한스러운 인생을 마감한 곳이라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짠한 마음이 들어 더욱 와보고 싶었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영월역에 도착했다
보름달 아래 기와지붕의 영월역

그리 늦은 밤도 아니었지만 거리는 한적하고 공기는 차가웠다. 불이 들어와 화려한 빛깔의 동강대교를 보며 영월대교를 건넜다. 동강이 보이는 숙소는 리뷰와는 다르게 가족여행 오기에는 음습한 느낌을 주었다. 열쇠를 받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방에 들어갔을 때 온기 덕분에 긴장이 풀려 편안해지려고 할 참에 침대 위에 불쾌함이 묻어있었다. 아주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다행히 다른 방으로 바꿔주셨지만 어긋난 첫인상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불 속에 들어가는 것이 왠지 찜찜하여 따뜻하게 옷을 입은 채 이불 위에 누워 쉬는데 몇 시간 지나니 방의 온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나도 방은 점점 식어만 가길래 아주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온기는 잠시 올라오다가 사라져 결국 나는 패딩을 입고 핫팩을 품고 잠이 들었다. 


영월의 버스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장릉에 갔다가 한반도 지형, 청령포, 그리고 관풍헌까지 돌아보겠다며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삼각김밥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놓치면 1시간 기다려야 하는 버스가 언제 오려나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조금 늦었지만 천천히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시골 풍경을 바라보았다. 논밭을 지나 관광지스럽게 식당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버스 정류장 맞은편 장릉 입구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한가했다. 16년이라는 짧은 시간 세상에 머물다 떠났는데, 혼자 너무 멀리 묻혀 사람이 찾지 않는 곳에 머무는 단종이 참 외로워 보였다. 


매서운 추위에 서둘러 입구와 가까운 단종역사관으로 들어갔다. 짧은 임기로 인해 전시물들은 적었지만 단종이 귀향 가던 중 있었던 일들이 몇몇 기록되어 있었는데, 믿었던 삼촌에게 모든 걸 뺏기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 흘렸을 어린 왕을 그려보니 무척 가여웠다. 

역사관을 둘러보고 장릉으로 향하는 표시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니, 멀리 보이는 장릉을 향해 소나무들이 줄지어 선 산책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장릉에 가까워졌을 때 키가 큰 외국인과 한국인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장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운의 어린 왕을 보려고 먼 영월까지 찾아와 준 외국인이 고마웠다. 

장릉으로 가는 길은 햇빛을 받아 따뜻하고 평안해 보였다

한참을 둘러보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지만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겨울 비수기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힌 가정집처럼 생긴 곳에 분식집 간판이 있길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더니 식당의 모습을 갖춘 내부가 드러나며 온기가 흘러나왔다. 조금 늦은 점심시간이라 식사가 되는지 여쭤봤더니 인상 좋은 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뜨끈한 국물이 고파서 짬뽕라면을 시키고 온화한 기운에 몸을 녹였다. 신선한 해물과 채소가 가득한 라면을 먹고 나니 잠이 솔솔 몰려왔지만 버스 올 시간이 다 되어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녹색 버스에 올라타니 텅 빈 버스에 할머니 두어 분과 머리를 양갈래로 땋고 모자를 쓴 관광객처럼 보이는 승객이 한 명 있었다. 뒤쪽 구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파란 하늘 아래 햇빛이 내리는 논밭과 시골집들을 바라보았다. 30분쯤 지나니 꾸불거리는 길이 나타나고 버스는 오르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봤던 한반도지형의 주차장이 보여 서둘러 내리는데 역시나 관광객처럼 보였던 여자도 함께 내렸다. 주차장뿐 아니라 한반도지형 가는 길에도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이곳에 비해 썰렁했던 장릉이 생각나서 잠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금세 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던 한반도지형은 예상과 달리 입구와 꽤 멀리 있었다. 태극기들이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고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작은 돌탑들을 지나 좀 더 걸어 작은 언덕을 올랐더니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모여 있었다. 나무 가지들 사이로 살짝 보이는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라 실망하려던 중 좀더 내려가니 보이는 풍경은 독특한 외형 덕분에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좌측은 평평한데 반해 우측에 나무가 무성한 것 역시 한반도의 동쪽에 산이 많은 점을 닮았다.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조금 눈에 거슬렸지만 굽이진 산들이 뒤에 펼쳐있고, 물결 하나없이 잠잠하여 거울같이 풍경을 담아내는 강과 가을빛이 듬뿍 내려온 작은 터전에 집이 옹기종기 모인 선암마을은 평화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져 잠시 나무 계단에 앉아 앞에 놓인 경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소리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한반도를 꼭 닮은 한반도 지형

돌아온 주차장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확인해 보니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영월읍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관광안내소에 계신 아저씨께 여쭤봤지만 버스가 없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앱을 열어 택시를 호출해도 반응이 없었다. '설마 그 먼 길을 걸어가야 하나...'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마음이 우왕좌왕하는데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여자가 정류장에서 종이를 손에 쥐고 보고 있었다. 

행여나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까 봐 소식을 전했더니 꼼꼼히 계획을 세워 온 그녀는 반대 방향 버스를 타고 가까운 면사무소로 가서 택시를 타고 미술관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오후 6시쯤 미술관 앞에 영월읍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온다며 그걸 타고 영월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는 버스 노선들, 버스 시간 등으로 촘촘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 역시 면사무소로 가서 영월로 가는 택시를 탈 심산으로 그녀와 함께 버스에 올라 두런두런 영월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면사무소 앞에 내려준 버스가 지나고 나니 마을에는 차도 사람도 없이 우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우리는 앱으로 택시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어 막막한 동질감을 느끼며 발을 동동거리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마을 분들이 먼저 말을 건네셨다. 관광지도 아닌 곳에 뻘쭘하게 서 있는 우리들이 안쓰러웠는지 여기는 콜택시로 택시를 불러야 한다면서 택시회사 이름을 가르쳐주셨다. 영월까지 4만 원이 넘을 거라는 기사분의 답변에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했다. 결국 함께 택시를 타고 미술관으로 갔다가 영월로 돌아오기로 했다. 

10분 후 나타나신 택시 기사 아저씨와 지방 교통 및 관광 산업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시골길을 지나니, 갑자기 강렬한 붉은색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질적인 풍경에 놀랐지만 붉은대나무라 칭해지는 짧은 길을 지나니 통창으로 안이 들여다 보이는 카페가 등장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카페 안은 시각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포근했다. 따뜻한 녹차 라테를 들고 카페를 지나 미술관으로 들어가자, 유리문을 통해 녹슨 철사들에 옭아져 있는 아무렇게나 쪼개진 통나무 조각들이 보였다. 나무들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니 하늘 한가운데가 뚫린 높고 커다란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설기 어진 나무 조각들 틈 사이들로 해가 들어와 어둠을 밝혀주어 오묘한 기운을 냈다. 

붉은빛이 나던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던 카페
나무들 틈 사이로 해가 비집고 들어왔다

미술관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다양한 주제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어서 오랜 시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처음 만났지만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는 강원도의 야외 미술관은 너무 차가웠지만 우리는 구경하는 재미에 가장 마지막으로 미술관을 떠났다.   

산으로 넘어가는 해가 비쳐서 더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예전엔 뜨개질로 작품을 만들었다던 그녀

이미 어두컴컴해진 길을 내려가 버스 대합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종이컵에 보온병에 담긴 물을 따르고 베트남에 갔을 때 사 왔다는 커피 믹스를 건넸다. 조금 식은 미지근한 물에 덜 녹은 커피였지만, 그녀의 친절이 가미되어 달달하고 따뜻했다. 고마운 마음에 서울행 기차에서 간식으로 먹으라고 마지막 남은 간식들을 주었다. 곧 막차가 도착하여 우리는 반가움에 한걸음에 달려 나가 버스에 몸을 싣고 여행에 대해 조잘거리다 보니 금세 영월읍에 다다랐다. 뜨끈한 저녁으로 차가운 속을 녹이고 싶었지만 근처 식당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문을 연 식당을 찾을 만큼 시간은 여유롭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편의점에서 산 간단한 저녁을 먹는 중, 그녀에게 늦지 않게 기차를 탔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 덕분에 나는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먼 길을 걷지 않았고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던 미술관에서 유쾌한 경험을 하였고 누군가의 인생을 잠시 엿보았다. 우리는 몇 시간 전까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모르는 상태로 지나갈 수도 있었다. 한 순간의 '저기요'라는 말 한마디가 각기 다르게 흐르던 그녀와 나의 시간을 합쳐놓았다. 

나는 외롭다는 감정을 잘 모른다. 혼자 여행하고 영화를 보고 구석구석 걸어 다니고 혼밥을 즐기고, 혼자 하는 쇼핑이 편하다. 혼자서도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나로서는 외롭다는 친구들의 말에 동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외롭지 않은 걸까? 

나 홀로 여행하던 중 만났던 그녀와의 시간에 나는 더 웃고 즐거웠던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나는 혼자가 편하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편하다는 것과 외롭지 않다는 것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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