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너무 많이 걸었는지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발톱에 멍이 들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전국 한파주의보가 발령했다. 영월로 넘어가기 전, 민둥산에 가보고 싶어 일부러 정선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가기는 아까웠다. 몇 벌 되지 않는 옷들을 겹겹이 두르고 민둥산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이 거의 없어서 눈에 띄었던 것인지, 플랫폼에 서 있던 젊은 역무원은 나에게 이렇게 추운 날 민둥산에 가려는 거냐고 물으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추운 날 근무 중에 친절한 인사를 건네었던 역무원
민둥산역 앞 계단을 내려와 어제 미리 찾아두었던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김밥집으로 향했다.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유리문에 아이들 유도대회에 가야 해서 문을 닫는다는 아쉽지만 다정한 글이 붙어져 있었다. 산에 오르기 전 든든하게 배를 채우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또 편의점에서 아쉬운 대로 사발면과 삼각김밥으로 몸을 녹였다. 기차역 이름이 민둥산 역이라서 역에 내리면 작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등산로 입구가 보일 것 같았는데 나의 안일한 예상과 현실은 달랐다. 편의점 아저씨께 길을 여쭤보니 조금 의아한 표정을 보이시며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셨다. 민둥산 입구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초보 등산객이 이 추운 날씨에 운동화 신고 산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었겠다.
산에 오르기 전, 김밥과 따뜻한 라면으로 든든한 아침을 먹으려 했던 김밥집
결국 비슷한 아이들로 간단히 배를 채웠다
민둥산 초입으로 걸어가는 길은 귀가 떼일 것 같이 매서운 바람에 더 길게 느껴졌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을 지나니, 반짝거리는 햇빛을 담고 흐르는 내천이 나타났다. 까악 까악 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파란 하늘에 까마귀 떼가 여기저기 날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까마귀들이 서로 부딪치지도 않으면서도 빠르게 나는 것이 신기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민둥산 가는 길 옆에 흐르던 내천
알록달록한 초등학교 맞은편 등산로 입구에 들어섰더니 다채로운 등산회 띠들이 촘촘히 묶여 있었다. 환경보호를 위해 나무 말고 그곳에 띠를 달라고 마련한 장소였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해가 듬뿍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은 정적이 흐르다가도 짹짹 거리는 귀여운 새소리로 채워졌다. 쌀쌀해진 민둥산을 찾는 등산객이 줄었던 건지 좁은 등산로에는 낙엽에 가득했다. 참새들이 길 중간에 모여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천천히 걷다가도 바스락거리는 발소리에 놀라 후드득 날아가버렸다. 한걸음 한걸음 오르다 보니 열이 나기 시작하여 매서운 추위는 손끝에만 남았다. 종종 고개를 돌리면 보이던 아름다운 전경이 비슷비슷해 보일 때쯤 벤치가 있는 쉼터에 도착했다.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왔던 길보다 더 긴 길이 남아있었다. 오랜 시간 몸에 차곡차곡 쌓인 게으름 덩어리들은 발목을 잡고 나를 끌어내렸다. 물집 터진 오른발의 욱신거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저리는 왼쪽 무릎을 내세워 내려가라고 속삭였다.
'억새가 한창인 10월은 한참 지났는데? 꼭대기에 올라가 봤자 억새는 이미 다 사라져 버렸을지도 몰라. 그러니깐 등산객이 하나도 없지. 산이 낮아서 정상에 가더라도 한라산 정상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지도 않을 텐데? 이렇게 아무도 없는 산을 혼자 오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 저번에 뉴스에서도 나왔잖아?'
평소와 다른 움직임에 놀란 근육들이 열을 뿜어내 숨이 찰 때마다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길인데 돌아가기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을 때 마침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쉬시는 중년부부와 젊은 딸을 발견했다. 조금 전 올라왔던 의심들과 염려가 수그러들어 더욱더 속도를 내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덧 길이 사라지고 낙엽으로 가득 찬 경사진 나무숲이 나타났다. 낙엽 때문에 미끄러워 조심스러웠지만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낭만적이었다.
어느덧 앙상했던 나무들은 사라지고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전망대와 그 뒤로 드리운 억새밭이 나타났다. 누렇게 물든 억새풀 뒤로 산 정상에 있는 소나무 몇 그루와 파란 하늘이 펼쳐있고 세찬 바람을 만난 억새들은 산들거렸다. 이렇게 넓게 펼쳐진 억새풀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산 꼭대기에!
억새풀이 가득해서 이색적이었던 민둥산 정상
굽이굽이 산맥 틈으로 마을과 내천이 내려다 보인다
매서운 바람이 너무 차가웠지만 끝까지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산책로 구석구석을 다니며 살랑거리는 억새풀 뒤로 내려다 보이는 산과 마을의 경치를 눈에 담았다. 아침에 지나간 마을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내천이 보였다. 올라올 때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위에서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그런데 핑계를 대며 쉬이 포기하려 했다.
나는 쉽게 시작하고 또 쉽게 포기했다. 언제부터였을까?
확실한 건, 호주에서 한국에 돌아오기 전은 아니었다. 호주 대학에서도 정형화된 교칙에 따르기보다는 학과장에게 레터를 써서 설득하여 학점 면제도 받고 최대 수강 과목 이상도 들었고, 영주권이든, 입사든, 회사 생활에서든 목표를 세웠다면 어떤 문제들이 발생해도 혹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목적지에 도달했었다. 주변에서 포기하고 더 쉬운 길로 가라고 하는데도 나를 다그치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어느덧 나는 운동조차도 두어 달 이상 꾸준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호주에서 한 회사에서 7년여 근무했었는데, 귀국 후 4년 동안 다섯 번 이직하고 얼마 전 여섯 번째 회사를 나왔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힘은 의지이다. 이전과 달리, 강한 의지를 지속시키는 뚜렷한 목표가 생길 정도로 내게 가치 있게 느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목표의식, 가치, 이 모든 것들을 정의하는 것도, '필히'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정하는 주체도 나 자신이다.
가벼운 예로,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다그치지도 않고 당장 생명이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매일 운동하는 것은 잠을 자는 것처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머릿속 깊이 심어 두고 행동으로 옮기면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 행동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에게 어떤 사명감도 주지 않고 오직 평안만 찾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사명감도 포기할 핑계만큼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데도, 핑곗거리만 쌓아가며 어리석게도 편하고 쉬운 길만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