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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머리 앤 Aug 20. 2024

비 오는 날의 앤트워프

앤트워프 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래

여행 3일차 저녁,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암스테르담을 떠나 앤트워프에 도착했다.

예쁘기 보다 ‘아름다운’ 역

암스테르담을 떠난 내가 내린 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라는 별칭을 가진 앤트워프 기차역. ‘세상에서 -’ 따위의 수식어를 잘 믿는 편은 아니지만, 앤트워프 역은 그 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부는 더 아름답다.

아름다운 역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앤트워프의 한 중식당이었다.

암스테르담에 비해 먹을 게 많았던 앤트워프.

원래 국물 요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춥고 한산한 앤트워프 밤거리를 걷고 있으니 앞에서 보이는 중식당이 간절해져서 들어갔다. 중식이라 동양인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벨기에 현지인들이 더 많아서 신기했다.

분명 패션의 도시로 유명하다 했지만, 패션의 향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앤트워프의 거리.

무미건조한 중앙역 주변의 거리를 지나 마침내 앤트워프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도착했다.

앤트워프 여행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이동이 용이하다는 사실과 네로가 눈물 흘리던 루벤스의 그림이 있다는 것. 물론 유럽 여행을 하면서 루벤스의 그림을 워낙 많이 보기는 했지만, 또 네로가 눈물을 흘렸던 그림이라는 점에서 다르데 다가왔다. 어떤 작품이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싶었달까.

성모 마리아 성당의 전경

다만 밥을 먹고 성당으로 넘어간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졌던 탓에 아쉽게도 루벤스의 그림은 보지 못했다.

짠돌이 st 여행을 하는 딸이 보고 싶어도 안 보고 돌아올까봐 걱정하는 부모님과의 실없는 대화

앤트워프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지나 도착한 곳은 앤트워프 마르크트 광장. 앤트워프 시청사와 브라보의 분수로 둘러싸인 그 고요한 광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라고 했다.

그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브라보 대위의 모습. 누군가의 손을 잘라버린 뒤 던지기 직전의 그 역동적이고도 잔인한 순간에 갇혀버린 브라보 대위를 보며 조각 예술이 가지는 시간성에 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Cafe Oud Arsenaal

추위와 비에 지친 내가 향한 곳은 앤트워프 구석의 어느 바였다.

벨기에어로 쓰인 맥주를 고르는 것은 어불성설이긴 하다.

열심히 고르고 있으니 쌉싸름한 것을 좋아한다는 내 취향에 맞춰 맥주 하나를 추천해 주셨다. 추천받은 맥주의 이름은 Noir De Dottignies.

Noir De Dottignies

맥주를 고르며 그는 나에게 대화를 걸었다.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 왜 그 맥주를 좋아하는지, 어디서 왔는지. 완전한 이방인으로 홀로 존재하던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다시 앤트워프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화를 이어가며 내가 좋아하는 맥주의 속성을 생각했다. 깔끔하고 쌉싸름한 흑맥주의 맛은 내가 생각하는 맥주의 본질 - 홀로 씹는 고독 - 과 닮아있다. 그래서 나는 흑맥주를 좋아한다. 혼자 있을 때는 더더욱.

맥주만큼이나 좋은 것은 가게의 분위기이다. 유럽 펍 특유의 분위기를 나는 사랑한다. 자유롭게 들어오고 이야기하고, 나가는 그런 펍의 분위기를. 이곳에는 펍은 맥주를 사고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대만큼 멋졌던 암스테르담 여행과 비교하자면 벨기에 여행은 실망스러웠다. 앤트워프의 시내는 내 예상만큼 예쁘지 않았으며, 비 오는 벨기에는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고대하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보지 못했고, 루벤스의 집은 문을 닫았다. 원하던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타인의 온기가 느껴지는 펍은 위로가 되었다.


완전히 홀로이기를, 온전히 이방인이기를 바라던 여행지에서 느낀 타인의 온기가 방해가 아닌 위로와 위안으로 느껴졌음이 애석하지만 다행스럽던 앤트워프 여행기는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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