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도 흐린 날도, 혼자서

브뤼헤, 겐트를 지나 마침내 브뤼셀

by 빨간 머리 앤

브뤼헤로 출발하는 날은 시작부터 음울했다.

기차역을 지나 도심에 들어온 나의 눈에 들어온 브뤼헤의 전경은 역시나 회색 도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별칭이 무색한 풍경이었다.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베긴회 수녀원은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물씬 풍겨오는 공간이었다. 분명 플랑드르 양식의 아름다움이 느껴져야 하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브뤼헤의 거리를 거닐다 보니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벨기에의 대표 음식인 와플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브뤼셀식 와플은 그래도 본 고장인 브뤼셀에서 도전해보고 싶었기에 대신 리에주식 와플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와플 가게의 분위기나 가격을 보니 우리나라 붕어빵 포지션인 것 같았는데 (그런데 이제 벨기에 물가를 곁들인...) 그래서인지 맛도 특별한 건 없었다.

너무 많이 봐서 감흥이 이제는 감흥이 사라져 버린 성당

의무적 관광을 마치고 바로 점심 식당으로 향했다.

All you need is love and a tasty sandwich

치아버터 샌드위치일 줄 알았는데 베트님식 반미가 나왔다. 가격도 10000원 정도로 벨기에 치고는 합리적이었다.

우중충한 브뤼헤를 떠나 겐트로 향하려고 할 때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브뤼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던 시점이라 그냥 떠나고 싶었지만 맑은 브뤼헤를 보지 않고 떠나는 것은 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싶어 구경을 이어가기로 했다.

브뤼헤에서 한 시간 남짓을 기차로 이동하면 또 다른 중세 도시, 겐트에 도착한다.

브뤼헤에서 겐트로 이어지는 일련의 여정 속에서 나는 적잖이 지쳐 있었다. 여행이 지쳤던 이유는 우중충한 날씨와 별다를 것 없는 도시의 풍경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10일치 짐을 담은 무거운 배낭 때문이었던 것 같다. 10유로 남짓의 비용이 아까워서 하루 종일 배낭을 들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에는 여유가 없었던 지라 10유로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도저히 1시간에 그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1시간에 투자하기엔 비싸긴 해) 그래도 지금이면 소탐대실이라고, 그냥 그 돈 내고 하루치 행복을 구매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하나, 혼자 하는 여행이라는 사실 역시 큰 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 사실 타인과 함께 하는 여행은 여행지 자체의 매력이 떨어지거나 어려운 일이 발생해도 타인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별로임’이 중화되곤 한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여행은 이런 상황에 매우 취약한데, 경험을 공유할 타인이 없으니 여행지 자체의 매력도와 날씨가 전적으로 여행의 만족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부분에서 '혼여'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예상을 벗어날 때, 그때가 바로 여행지가 아니라 나와의 대화를 시작하는 시점이다.

피스타치오 젤라또 더 많이 먹고 올걸!

그래도 단비처럼 내려진 브뤼셀의 맑은 날씨는 역시나 반가웠다.

벨기에 여행 중 가장 아름다웠던 도시는 브뤼셀이었다.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그랑플라스 광장도 아름다웠으나

이쁘긴 이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노을을 보기 위해 올랐던 예술가의 언덕이었다.

해외여행을 다닐 때 좋은 점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던 순간들이 여행에서는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 여행지에서 보려고 하면 왜 이렇게 어렵고 소중한지.

그렇게 예술가 언덕에서의 노을을 끝으로 브뤼셀에서의 밤을 마쳤다. 모든 것이 적절해서 아름다웠던 브뤼셀 여행에서 남는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브뤼셀의 야경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함께할 때는 몰랐으나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한 뒤로 해가 오후 11시에나 지는 여름의 유럽에서 야경을 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다. 특히나 그곳이 치안으로 악명 높은 브뤼셀이라면, 밤의 풍경을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아쉬움이 있어야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 벨기에에서의 일기는 여기서 마친다.

끝마치려고 보니 집 가는 길에 찍은 어둑한 밤의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 장 남겨본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와 함께 벨기에의 낭만을 남긴다!

현생에 지쳐 오랜 기간 돌아오지 못했는데, 드디어 종강을 했으므로 앞으로는 꼬박꼬박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 주에는 마요르카에서의 여행기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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