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거리를 걸으며.
처음 혼여를 시작했을 때 느낀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갓 구운 빵 한 개를 사서 아침으로 먹는 것은 유럽 생활에서 찾은 나의 첫 번째 낭만이었다.
유럽 생활의 두 번째 낭만은 바로 미술관 방문하기.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 역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렘브란트 초상화를 본 후, 죽기 전에 램브란트의 역작이라는 야경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싶던 야경을 봤을 때 그 기분은 - 마치 죽어가던 네로가 마침내 루벤스의 그림을 봤을 때 같았다. 흐릿하게 그려진 사람들 너머로 튀어나올 듯이 묘사된 중심인물들. 카라바조와는 전혀 다른 빛과 어둠의 부드러운 대비는 렘브란트의 화풍이 후기에 이르러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아쉬웠던 점은 야경을 감상하는 분위기였다. 카라바조 풍의 극적인 색감을 물려받은 야경을 감상하기에, 국립박물관의 회랑은 너무 소란스러웠달까.
야경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렘브란트의 습작이었다. 장엄하기보다는 어둡고 비참한. 그래서 더 슬픈 그림 속 인물들은 꽤나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사실 시간을 더 두고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으나, 감상에 너무 많은 열을 쏟아서인지 급격히 공복감이 들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의 명물이라는 애플파이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날씨도 좋은 김에 야외에서 먹기로 했다. 혼자일 때 많이 마셔줘야 하는 맥주는 덤. (이날을 기점으로 여행 내내 일일 1 맥주를 실천했다. 역시 맥주는 혼자 마시는 맥주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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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면 무엇을 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주로 멍하니 있거나 일기를 쓰곤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즉석에서 적어 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혼여의 큰 장점인데, 감정들은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거르지 못해 문제가 되는 말들은 있지만, 거르지 못해 문제가 되는 감정은 없다. (물론 표출은 문제가 된다)
너무 일찍부터 움직였더니 예상했던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도 시간이 너무 남아버린 관계로, 운하에 앉아 암스테르담의 날씨를 즐기기로 했다. 맑은 날, 운하 아래에 앉아 보내는 시간은 정말 낭만 그 자체였다.
적당히 바쁘게 보내서 약간은 지친 채로, 그렇지만 여전히 여행에 대한 열정은 남은 채로 - 운하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암스테르담이 좋았던 이유는 이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맑은 날에, 아무런 목적 없이 앉아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좋아서. 그리고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내가 이 여유로움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어서.
지나가다 들어간 어느 서점에서 발견한 독특한 포스터들. 엄마한테 보여줄까 하다가, 친구에게만 공유하는 선에서 멈추기로 했다. 아직 그녀가 수용하기엔 너무 개방적인 세계인 듯하다.
감튀 하나로 때운 이날의 저녁. 감자튀김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고 서서 먹는 저녁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 때는 정말 긴축 기간이었으므로 감자튀김으로 저녁을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첨언하자면, 네덜란드 물가가 너무 비쌌다. 저 조그마한 감자튀김에 케첩이 8유로 남짓이었으니... 감자는 그렇다 쳐도 케첩 가격은 정말 야박하다.) 혼자 다니다 보면 갈수록 식사가 부실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혼여의 민낯은 아니고, 가난한 혼여객의 민낯이랄까.
그렇게 감튀를 사들고 숙소를 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들. 옛날에는 야외 식사가 유럽 낭만의 정점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안다. 이건 그저 서비스 차지와 온갖 부가세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의 산물임을. 역시 인생은 멀리서 봐야만 희극이다.
전날 방문했던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시내로 가는 길. 이 강을 건널 때까지만 해도, 나의 계획은 반 고흐 미술관에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걸으면서 생각해 보니, 반 고흐는 많이 봤지만 네덜란드의 상징이라는 풍차는 한 번도 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근교인 잔세스칸스가 왕복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급히 잔세스칸스로 행선지를 바꿨다. (같이 여행할 때는 이랬다가 큰 일 난다.)
풍차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입구 초입부터 풍차로 가득했다.
의외로 재밌었던 박물관들. 사실 박물관보다는 기업 박람회 느낌에 가까웠지만 나막신 만드는 모습을 보고 네덜란트 치즈를 먹어볼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그렇게 평화롭던 잔세스칸스를 뒤로 하고 나는 다음 여행지인 앤트워프로 떠났다. 역시나 혼자였다. 그러나 더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혼자서 국경을 넘는 일도, 혼자서 이방인이 되는 경험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혼자이기에 느끼는 의무감보다 혼자여서 가질 수 있는 권리와 행복감이 압도적으로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음을 나는 미리 알았어야 했다. 그리고 나의 행복감이 나의 내적 성장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였다는 것도.
여하튼 낭만의 국가에, 혼자여서 좋았던 암스테르담 여행기는 여기서 끝마친다. 다음 편에는 앤트워프에서 생긴 일을 담아보겠다. 때때로는 슬픈 혼여의 이야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