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혼여는 로마에서

파스타, 파스타, 파스타!

by 빨간 머리 앤

어떤 인간에게도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는 여행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여행이 어떠한 의미인지 정의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여행의 의미란 대체로 새로움에서 온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마주하고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먹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을 대하는 그런 일들에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런 나에게 ‘두 번째’ 여행지는 현저히 매력도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두 번째는 새로운 공간보다 새로운 감각을 주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여행지로 로마를 택한 것은 2023년 마지막 날, 그 혼란스러운 12월 31일에 먹었던 까르보나라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12월 31일, 트라스테베레의 식당에서

애석하게도 나의 로마 여행을 함께했던 이는 까르보나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알리오 올리오를 제외한 모든 이탈리아 파스타를 그리 탐탁지 않아 했다. 그렇기에 나의 첫 여행은 더 먹지 못한 까르보나라에 대한 아쉬움만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혼자, 다시 로마로 향했다. 그때 먹지 못했던 까르보나라를 다시 먹기 위해.

이탈리아 순회 일지. 구글 지도에 좀 더 자세히 기록해두지 않은 것이 아쉽다.

첫 여행 때 이미 이탈리아를 10일 가까이 순회했으므로 이탈리아의 유적지나 다른 장소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직 ‘까르보나라를 먹겠다’는 목적만 가진 채 로마로 향했다.

시작은 디저트. 공항을 벗어난 내가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것은 각종 피스타치오 디저트였다.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과 이탈리안 티라미수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디저트를 먹고 한숨 돌린 뒤, 바로 최종 목적지였던 트라스테베레로 향했다. 로마 시내에서 40분 남짓 떨어진, 나의 까르보나라가 있는 곳! 물론 로마 시내에도 유명한 까르보나라가 많았지만 어쩐지 꼭 다시 그곳에 가고만 싶었다.

40분 남짓을 걸어 마침내 나의 레스토랑 Osteria ill matto에 도착했다. 레트로랑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내가 사랑했던 야외 테라스석, 묘하게 풀어진 분위기 - 그리고 내가 그리워했던 까르보나라까지.

하나 변한 것이 있었다면 이제는 40분의 도보가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는 나뿐이었다.

전보다 조금 더 타버린, 그러나 여전히 감동적인 까르보나라를 먹으며 오랜만에 감격스러움을 느꼈다. 유럽 전역에서 아무리 비슷한 맛을 찾아다녀도 결국은 페코리노 치즈와 관찰레가 주는 짭조름함을 찾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년만에 훨씬 좋아하게 된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한적한 카페로 향했다. 어딜 가든 몹시 붐비는 로마 시내와 달리 트라스테베레는 상당히 한적했다. 그래서 오랜만의 카푸치노를 고요하게 즐길 수 있었다.

첫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레비 분수로 마무리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로마는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물론 처음 마주했을 때의 웅장함이나 새로움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간 로마는 다른 의미로 새로웠고, 그래서 또다시 로마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의 행선지 '아시시 Assisi'는 전날 내 이불속에서 즉흥적으로 결정된 여행지였다.

하루쯤은 근교를 가볼까 싶어서 지도를 살펴보던 중, 산악 지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도시 아시시가 마음에 들어왔다. 거리도 로마로부터 그리 멀지 않고, 기차 편도 충분한 -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드는 여행지였다.


여정은 9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나는 근처 카페에서 아침을 테이크아웃했다. 메뉴는 피스타치오 크루아상과 연어 샌드위치. 애석하게도 나의 노력은 무의미했는데 - 나의 기차가 무려 2시간이나 연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지막이 도착한 기차 안에서 나는 실패할 수 없는 피스타치오와 내 인생 최악의 연어 샌드위치를 동시에 맛볼 수 있었다.

성의 없는 쿠키와 물, 그리고 말라 비틀어진 견과류가 전부였다.

사실 유럽에서 좀 지내다 보니 2시간 연착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의 인내심에 도달했다. 그러나 다음 상황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는데, 아씨시를 두 정거장 정도 남긴 채로 Foligno라는 낯선 도시에 던져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죄의 의미로 남겨준 courtesy kit와 함께.

아시시로 향하는 다음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적어도 2시간은 기다려야 했던지라, 허탈한 마음을 안고 시내로 나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소도시, 그것도 일요일 오후의 소도시는 놀라우리만치 고요했다. 특히 내가 던져진 Foligno에는 나와 함께 버려진 기차 탑승객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연 가게는 거의 없었고 도시는 몹시 작았다. 도저히 여기서 2시간을 버틸 수 없겠다고 판단한 (그리고 이렇게 아시시를 갔다가는 오늘 꼭 로마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시시 대신 다른 도시로 향하기로 했다.

Spoleto에 내려서

Assisi를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한 무리의 여행객을 만났었다. 유럽의 자연스러운 스몰톡 문화를 탑재한 그들은 자신들이 Spoleto를 가고 있다고 말했었다. Assisi를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이전의 나는 아무 의미 없이 그 말을 넘겼었다. 그러나 행선지가 사라지고 나니, 문득 몇 시간 전의 그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시시 대신 Spoleto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Spoleto는 상당히 묘한 곳이었다. 마요르카의 도시 발데모사를 연상시킴과 동시에 포르투갈의 리스본도 생각났다. 전반적으로 이탈리아의 도시보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연상시키는 공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플레토의 풍경들

콕 집어 어땠노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골목과 산이 어우러진 공간이 주는 자연스러움이 더없이 좋았다. 사람은 없었지만 Foligno의 적막함은 아니었다. 적당한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불시착한 스폴레토에서도 약간의 해프닝은 있었다. 스폴레토에서 무엇을 할까 찾아보던 중 도시 초임에 마리토조로 유명한 카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픈 시간까지 한참을 기다렸으나 가게 앞에 붙어있는 시간표와 다른 자유분방한 영업시간에 결국 그 카페를 포기했다. 마리토조와는 연이 없나 보다고 생각했으나, 마리토조 대신 크림이 들은 크루아상을 먹었다.

충동과 낭만은 한 끗 차이다

이날은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이자, 7개월 남짓의 유랑 생활이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몰려오는 양가감정을 억누르며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피자를 먹기 위해 판테온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피자는 그렇게 맛있지 않았다. 고민하던 끝에 전에 먹었던 그 피자를 찾아 바티칸으로 향했다.

그렇게 유명한 것도,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었던 그 브로콜리 피자가 왜 그렇게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로마 시내에서도 충분히 비슷한 피자를 찾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따라 꼭 바티칸에서 먹고 감격스러웠던 그 피자가 다시 먹고 싶었고, 그래서 무더위 속에서 1시간 30분을 걸어서 바티칸으로 향했다.


바티칸의 관광지를 뒤로 하고 바로 피자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브로콜리 피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첫날에 음식에 관한 행운을 모두 소진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기며, 다른 피자를 고르기 시작했다. Napoli 피자를 선택하려다 '진정으로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면 주위를 둘러보라는' 누군가의 조언이 떠올라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쫄깃한 도우는 여전히 맛있었으나 역시 브로콜리 피자 만은 못했다. 아니면 혹시 그날의 나는 배가 고팠던 걸까 - 따위의 생각을 뒤로하며 2023년 입국했던 로마의 공항으로 다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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