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17년 여름,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엄마 나이 84세였다. 이른 죽음은 아니었지만 평소 건강에 신경 쓰던 엄마였기에 먹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아버지보다 적어도 5년은 더 사실 줄 알았다. 그렇게 믿어왔고 또... 그러길 바랐다. 내가 믿었던 연령보다 일찍 일어난 엄마의 죽음은 그러기에 내게는 갑작스러운 사고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손자들의 할머니가 되었던 엄마의 삶은 이제껏 내가 살아온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그러진 모양새도 비슷했다. 떨쳐 나오고 싶었던 결혼생활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엄마가 결국 죽어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이런 표현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만), 나의 삶도 그렇게 끝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갱년기를 넘긴 50대 후반이 되어 있었다.
늘 시간 맞춰 밥을 준비하고 육아를 하는 것은 일하는 아내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인 반면, 돈을 벌어다 주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은 강요되었다.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첫 손자가 태어날 즈음 그간의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부여된 의무만 있을 뿐 나에 대한 사랑과 배려와 존중이 결여된 결혼생활, 그것은 그간 나의 존재도 결여되었음을 의미했다.
엄마를 잃은 커다란 상실감과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듯 공감 없는 남편, 갑자기 다가온 막막한 노후에 대한 불안으로 내 마음은 바닥까지 공허했다. 사랑보다는 질책을, 배려보다는 강요를, 존중보다는 규제를 받으면서 의무를 다하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날들에도 내가 없다면 이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울과 무기력감으로 하루종일 누워있거나 휴대폰 게임으로 낮과 밤을 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 명상을 하던 중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나타났다. 뒷집에 사는 또래 남자 애가 던진 돌이 내 이마를 맞혔고, 나는 턱까지 흘러내리는 피를 종이로 닦아내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며 처연하게 집 밖에 앉아 있는 외로운 계집아이! 어린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울음이 올라왔다.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나는 가여운 아이구나! 가여운 아이는 커서 존중받지 못하는 가여운 아내가 되었구나!
나를 사랑해 주기로 했다. 나 자신을 외면하고 남편과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하며 사느라 너덜너덜해진 나를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 나를 위해 여행을 하자. 내가 원하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보자. TV로만 보던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 집시의 플라멩코가 생각났다.
바로 노트북을 열고 마드리드행 왕복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혼자만의 여행이라 겁이 나고 두려웠지만, 이쯤에서 그만 살아도 괜찮을 듯싶었다. 엄마로서의 책임과 결혼에 대한 의무를 모두 마친 나이이니 이제 아무런들 어떠랴!
15일간의 일정으로 갈 곳과 볼 것들을 인터넷을 통해 알아봤다. 스페인은 넓고 볼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도시를 추리고 노선을 정한 다음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질색이라 공항에서부터 숙소까지의 기차 편과 도시를 이어주는 버스 등, 필요한 교통편을 모두 미리 예매했다.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성당과 종탑 관람, 알람브라 궁전은 예약이 필수다.
여행일정을 짜면서 나는 이미 행복했다.
이국에 대한 호기심, 항상 궁금했던 그라나다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짜릿함, 지중해 음식과 올리브를 먹는 상상, 온몸의 촉수를 세우고 낯선 곳을 탐색하며 즐거워하는 본래의 내 모습, 무엇보다 혼자 하는 배낭여행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나를 긴장시켰다. 별 일 있겠나!
모든 예약을 마쳤고, 이제 떠나기 전에 해야 할 마지막 남은 일은 여행 중 아프지 않기 위해 체력단련을 하는 것이다. 다음 날부터 출발 전 날까지 매일 1시간 걷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는 날, 배낭을 둘러메고 공항으로 향했다. 결연한 나의 의지를 확인한 남편의 얼굴에 긴장이 스쳐갔다.
중년의 끄트머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혼자 떠난 스페인 배낭여행!
별 일은 날마다 일어났고, 길지 않은 15일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대문 사진 출처 : Pixabay로부터 입수된 Edar님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