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무너진다.
1년 동안 새벽기도를 한 후에 이 남자를 임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이지만 당장 먹고살아야 했기에 아이를 물고 빨며 온전히 하루조차 보낼 수 없었다고 했다. 아이는 혼자 놀다가, 때로 울다가, 젖 먹는 타임이 돼야 엄마 품에 안겨질 수 있었고 타임이 끝나면 바로 엄마에게서 떨어져야 했다. 아버지는 가정에 관심 없는 글 읽는 한량이었고, 엄마는 경제적 가장의 무게를 등에 지고 오로지 돈에 집중한 삶이 전부였다. 부모 중 누구 하나도 육아라는 개념을 머리나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는, 그저 낳아 놓기만 하면 저절로 크는 줄 아는 시대에 태어났다.
부모는 초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돈과 할머니를 붙여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한 것은 먹이고 재우는 일 두 가지뿐이었다. 풍요 속에 자란 아이는 부모보다 돈이 힘이라는 걸 일찍이 알아버렸다. 돈 잘 쓰는 아이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따라다녔고, 그들은 그와 같은 부류의 한 패거리와 괴롭히기용의 가난한 집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이는 자라서 대학시절까지 마치고 이 남자가 되었다. 취직을 해서 돈을 벌었지만 그의 엄마는 돈이 남아돌았으므로 계속 그에게 용돈을 줬다. 그리하여 이 남자는, 지갑에 들어있는 현금은 금액을 불문하고 그날 다 쓰고 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텅 빈 지갑은 언제나 그의 엄마에 의해 다시 채워졌다. 모든 일을 엄마와 돈으로 해결해 오면서 공감능력을 배우지 못한 이 남자가 그동안 살면서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드디어 미안해야 할 일이 생겼다. 상대는 딸이었다.
그날은 딸의 스튜디오 웨딩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결혼식 준비로 예민해진 딸은 하루종일 굶은 상태로 드레스를 몇 번이고 갈아입으며 화보촬영 감독님의 요구에 맞추느라 많이 지쳐 있었다. 촬영 중간 잠깐 쉬고 있는 딸에게 이 남자가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대뜸 친지들 중 누가 누가 올 것이며, 축의금이 벌써 얼마가 들어왔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빠가 어떻게 말을 했으며, 나아가 누구누구에게 알렸으니...... 순간 딸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눈치 없는 그가 캐치했을 리 없다. 신랑과 신랑의 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
딸은 그날 저녁 제 신랑 앞에서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딸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이 이 남자와 처음으로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이 남자만 몰랐던 미안한 경우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의 자기 변론은 생각보다 강경했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는 오로지 타당한 이유만 있고 미안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변론의 초점은 전부 돈이었다. 대화는 점점 열기를 더해갔고 결국 모두가 밤을 새웠는데, 지쳐 떨어져 나간 사람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이었다.
얻어진 결론은, 이 남자는 절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미안하다고 말로 뱉는 순간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모두 힘을 잃고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닷소라의 단단한 껍질처럼 자신의 속살을 보호하는 갑옷과 같은 것으로, 이 남자가 미안한 것은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 숨어서 어린 자신을 지켜냈을 그가 안쓰러웠다.
결론조차 그 남자가 내린 것이 아니었다. 영적 자아의 방어 본능은 의식으로 드러난 무의식을 읽어내지 못할 만큼 무지몽매하고도 처절했다. 유년기의 그가 받아야 했을 부모의 사랑은 여우의 신 포도와 다름없었다.
이후로 이 남자에게 미안해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을 몰랐다면 이해하지 못할 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확하게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는 아주 가끔씩 내게 미안하다고 한다. 그러나 미안함을 인정하는 것은 여전히 그에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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