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런던의 숲 Hampstead Heath 산책

4 seasons in one day

by Sue

자고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쨍한 봄햇살로 가득했다. 오늘 같은 날은 Hampstead Heath에 산책 가기 딱 좋은 날이다. 파아란 하늘은 9시간의 시차도 금방 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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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지붕들은 저마다 각각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마름모도 똑같은 마름모가 아니다. 창문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마름모 지붕, 두 개를 가지고 있는 마름모 지붕, 세모 지붕, 네모 지붕 각기 다르지만 어느 하나 모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렸다. 아마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둥그런 분위기를 자아내서 그런 건 아닐까 싶다.


집에서 숲까지는 지도상으로는 가까운 듯 보였지만 막상 걸어가니 30분은 걸렸다. 골목을 지나고, 작은 상점들이 모여있는 거리도 지나고, 공동묘지도 하나 지나야 비로소 Hampstead Heath를 만날 수 있었다. 입구가 어디인지 몰라서 아무 데로나 들어갔다. 숲을 경계하고 있는 울타리가 따로 없어서 그냥 나무사이로 걸어갔더니 어느새 숲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숲의 동서남북 어디인지 모를 나무 사이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이 펼쳐진다. 연못을 바라보고 작은 벤치가 있다. 이 벤치에는 누가 앉아서 어떤 생각들을 할까?

가만히 앉아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세상 모든 고민을 없애주는 마법의 벤치는 아니지만, 고요함은 얻을 수 있었다.

퇴사를 결정하고, 실행하고, 집을 정리하고 여기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생각들이 나를 스쳐갔다. 미처 스쳐가지 못하고 여전히 머물러 있는 생각들도 있다. 나를 북돋워주는 생각들과 마음을 무겁게 하는 생각들, 현실을 고민하는 생각들, 미래를 꿈꾸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 공간을 공유한다.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과 남겨두고 싶은 생각들이 있는데, 남겨두고 싶은 생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들만 남을까 봐 걱정이 된다.


여러 생각들을 벤치에 남겨두고 발걸음은 숲을 향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넓은 숲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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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주인들은 여럿이겠지만 내가 만난 주인들은 사슴과 오리였다. 사실 연못이 있으니 오리를 만난다는 것은 쉽게 예상이 가능했다. 그런데 사슴이라니?! 그것도 자유롭게 마치 자기 집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쉬고 있는 사슴들이라니. 여러 사람들이 사슴을 구경했지만 사슴들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잠시 서서 조용히 바라보고 다시 제 갈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시 안에서 자연과 인간이 바람직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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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낮인데도 사람들이 많은 듯 적었다. 분명 화장실 줄은 엄청 길었는데,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나 싶을 만큼 인구밀도가 낮았다. 아니면 땅이 넓은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 신나게 산책하는 강아지들,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서로의 행동과 공간에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바라보는 나도 행복해졌다.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부러움을 한가득 담은 눈에 어느새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화창하고 맑은 하늘에 회색이라니! 그냥 지나가는 구름이길 바라면서도 발걸음은 자동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갈 때까지만 비가 내리지 말길.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구름이길.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날씨가 추워진다. 1분 전만 해도 햇살이 따뜻해서 자켓을 벗었는데 말이다. 역시 영국은 하루에 사계절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나는 그냥 봄만 경험하고 싶은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경보를 하기 시작했다. 제발 비가 조금만 있다가 내리길 그토록 바랬건만 숲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가랑비도 아니고 정말 우르르 쾅쾅 쏟아졌다. 망했다. 피할 곳도 없어서 나무밑에 서있었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점점 비 맞은 생쥐가 되어가고 있었다. 흰 바지를 입고 나왔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30분쯤 쏟아진 후 비가 그치고 다시 세상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나무 밑에서 나와 집으로 걸으면서 본 골목길은 물기가 더해져서 더욱 선명하고 깨끗했다.

온통 물기를 머금은 나는 그냥 추웠다. 오들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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