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울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눈부신 빛은
가장 깊은 어둠을 숨긴다
아름다움은 칼날 위의 춤,
아슬아슬한 숨결 위에서
흔들리다
결국 스스로를 베어낸다.
쏴아아아 –
깊은 잠에 빠져있는 나를
누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듯,
눈이 번쩍 떠졌다.
‘비 오면 안 되는데...
피레네에 비가 많이 오면
위험하다던데...’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걷기에는,
아직 사방이 어둠으로 깔려있었다.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잠이 한 번 깨고 나니,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다가
6시쯤,
자는 순례자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침낭과 배낭을 가지고
방에서 나왔다.
오늘 침낭을 처음 말아보았다.
말아놓은 침낭이 커버에 들어가지 않아
다시 꺼내 말았다.
세네 번을 반복해도 들어가지 않아
대충 배낭에 쑤셔 넣었다.
아침식사로 대충 허기만 채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에 내린 큰비는 다행히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처음 사용해 본 워킹스틱을 잡고
걸었다.
스틱과 스텝이 엉켜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짐이 될 것만 같았다.
걷다 보면,
스틱을 의식하지 않아도
내 발걸음과 박자를 맞추고
자연스럽게 될 때가 있겠지.
익숙해지면
자연스러워지고 편해져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안개꽃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피레네산맥은 신비로웠다.
나는 서둘러 가는 사람들 속에
내 속도를 맞추지 않고,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숭고함과 경건함,
그리고 동시에 장엄함이 느껴지면서,
인간을 초월하는
감탄과 두려움을 느꼈다.
피레네산맥의 장엄한 풍경에
넋을 빼앗기고 있을 때,
순례자들은 그새,
내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 혼자 걷고 있었다.
걷다 보니,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어제 멀리서 보고 들었던
가축들의 평화로움이,
지금은
그것들이 남긴 배설물만 눈에 보였다.
비에 진흙처럼 짓눌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덜 밟을까 하고
사이사이를 조심스럽게
총총거리며 걸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는데,
이미 앞서 걸었던 소녀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 길이 아니에요.
잘못 들어섰어요.”
“오는 길에 갈림길이 없었는데...
이 길 하나밖에 없었어.
게다가 길바닥에 화살표도 있었다고.”
나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말했다.
“지나왔던 길에 십자가 있던
작은 돌무덤 있었지요?
그쯤에서 언덕을 가로질러야 했어요.
내 앞에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도
우리처럼 길을 잃고
되돌아오는 중이에요.”
아름다운 풍경에 심취해
걷고 있는 사람들과 멀어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소녀는 말했다.
갑자기 번개가 지나가듯
정신이 번쩍 들어, 뛰듯이 걸었다.
비가 내렸고
물안개가 산 아래에서 피워 올라
피레네의 모습을 삼켜버리더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려 길도 미끄러웠다.
날이 흐려 금방 어두워지기라도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조난사고로 이어지면
그 이후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고
마음이 조여 오면서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피레네에서는 예상치 못한 기상변화가
자주 일어난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갑자기 영화 ‘The way’가 떠올랐다.
피레네산맥에서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죽음에 이른
아들의 시체를 찾아,
유해를 뿌려주기 위해
순례길에 오른 아버지의 여정을
그린 영화이다.
그러고 보니,
피레네산맥을 걷는 도중에
작은 돌무덤을 몇 개 지나쳐 왔다.
피레네산맥의 숨 막히게
아름다운 절경 뒤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언제나 위험은
아름다움 속에 가려져 있었다.
꿈을 꿨다. 출국 4일 전에.
투명한 향수병이 깨져
핑크빛 향수가 흐르고 있었다.
꿈을 꾸고 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께름칙했었다.
병이 깨졌다는 사실만으로.
‘지금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한 꿈인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지.
내가 여길 어떻게 왔는데... '
'일도 그만두고
3개월 전부터 준비하고 왔어.
이젠 돌아갈 곳도 없는데...'
'12시간 날아온 것도 모자라,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버스 타고
또 열차까지 타고...
세 번이나 갈아타고 생장에 도착해서
첫 여정인데...'
'이건 말도 안 돼.'
'집에 유서도 써놓지 못하고 왔는데,
타지에서 죽다니...’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더니
온몸이 싸늘해졌다.
나는 깨진 병을 머릿속에 지우려고,
심장이 뛰는 것만큼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온갖 가축들의 똥을 덜 밟겠다고
조심스레 걸었던 아까와는 달리,
사정없이 밟으며 뛰다시피 했다.
‘죽는 마당에 똥 밟는 게 무슨 대수라고...’
비에 범벅이 된 소똥은
진흙처럼 미끄러워,
뛰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지금 이 상황이 내가 꿨던 꿈과
전혀 상관없길 바랐다.
잠깐 길을 잃었을 뿐인데,
꿈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불길한 꿈 생각도
걸어야 할 길도.
걷기 시작하면 무조건 다음 마을인
론세스바예스까지 가야 했다.
수시로 바뀌는 자연현상을
예측할 수도 다스릴 수도 없기에
‘나’라는 존재는
자연 앞에 한낮 무력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걸었다.
여기에 묻힐 수 없다는 절박함이
힘차게 걷도록 재촉하였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피레네에서.
40분 정도 지났을까.
내 앞에 우의를 입은 세 사람이 보였다.
악몽에서 깨어난 순간이었다.
“혼자 걷다가 사람을 보니
안심이 되네요.
오다가 길을 잃었거든요.
와이파이도 안 터지고
사람도 안 보이고 겁부터 났어요.”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님에
안정을 되찾아 말을 걸었다.
“우리도 길을 잃어서,
되돌아서 가는 길이예요.
우리 세 사람 중 한 명이
와이파이가 터져 다행이죠.
부엔 까미노 앱 보고 우리가 이탈하는지
보면서 가는 길이예요.”
“다음에 피레네에 오면
페인트통을 들고 와서
땅바닥에 화살표를 그리고 싶어요.
분명 길에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
걸었는데,
그 길이 아니라니..."
"이 험한 산에서 길을 잃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옆으로 빠지라는
표시판 하나 없을 수가 있어요?”
한 순례자는 위험한 피레네 산맥에
제대로 된 표시판 하나 없다는 것에
격분해서 말했다.
길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특히 오늘처럼 길을 잃고 나서는
더욱더 그렇다.
힘든 상황에서
서로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고
의지가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
나는 길을 잃고 일행을 얻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을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이
거슬러 올라갈 수 없듯이
피해 갈 수 없는,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을까...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다.
비는 추적추적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촉촉하게 적신 나무 풍경은
유명한 사진작가의 ‘소나무’를
떠오르게 했다.
흐림과 선명함이 공존하면서,
삶과 죽음이
경계에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감정은
물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고,
동행자들이 생겼다는 든든함으로 바뀌었다.
산티아고까지 765km 남았다는
표지석을 지나니
바로 롤랑의 샘이 보였다.
롤랑의 샘을 기점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이 나뉜다.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에
뭔가 큰일을 해낸 것 마냥 뿌듯했다.
롤랑의 샘을 지나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자갈이 깔린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했다.
비가 온 후라 미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스틱으로 먼저 중심을 잡고
몸을 스틱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내리막길 고비만 넘기면
론세스바예스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하루 동안 얼마나 변덕스러운 날씨였던가.
감정 또한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다채로웠다.
하루의 길이가 길었다.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절대적으로 하루는 같겠지만
내가 느끼는 오늘 하루는
길고도 정말 길었다.
멀리서 마을이 작게 보였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 이런 것일까.
피레네 산맥의 고난은
지금 내게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안겨 주었고,
앞으로 남은 순례길에
용기를 주었다.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