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흉터가 아니라 별자리를 만든다(순례길)

순례길을 걷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by 시안블루



누군가는 시작을 위해,
누군가는 끝을 맺기 위해
걷는다

새로운 나를 찾으려는 이도,
잃어버린 나를 되찾으려는 이도 있다

그 모든 발자국이 모여 길이 된다




'내가 여기 왜 왔을까?'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육체적 한계는,

내가 처음 순례길을 걸으려고 했던

초심에 의문을 던졌다.


눈이 반쯤 감기고 몸이 축 처져

땅에 주저앉을 것 같은 그때,


그때였다.


멀리서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소, 양, 말들이 이동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청아한 구원의 종소리는


순례길의 초심을 흔들어 놓은,

혼란스러웠던 내 맘을

평온하게 해 주었고,


뿌옇던 내 눈과 머리가

그새 맑아졌다.


가축들은 피레네산맥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산 중턱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것들은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풀을 뜯어먹고 나면

역동적으로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같은 곳에 머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에 머물면 안 돼.

일도 그만두고 힘들게 왔잖아.


이젠 돌아갈 곳도 없어.

그러니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


초록빛을 유감없이 발산하며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움직이는 가축들의 생동감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산을 올라,

고원에서 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장엄한 초록빛으로 눈부셨다.

경이롭까지 했다.


신비로운 느낌에 내 눈을 의심했다.

산과 하늘이 닿을 듯 말 듯했다.


초록이 온 세상을 삼켜 버린 듯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육체적인 고통이 멈추고 마음이 충만해졌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 순간을,

나는 유감없이 즐겼다.






오리손에는 오후 6시쯤 도착했다.

내가 마지막 도착자였다.


생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일찍 출발한 순례자들은


진작 오리손에 도착해

이미 다른 순례자들과 친해져 있었다.


웃고 떠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쭈뼛쭈뼛 어색해하고 있었다.


6시 반에는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이름, 국적, 순례길에 온 이유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순례자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올 초에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


말하다가 울컥한 순례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서는 티슈 한 장을 건넸고,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걷는데 집중하면서

슬픔을 잊고 싶어 졌어요.”


순례자들은 한 명씩 일어나

순례길을 오게 된 이유를 간단히 말하였다.


“옆에 있는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해서

끌려 왔어요.”


옆의 친구를 바라보며 말하자,

순례자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요.”


“나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요.”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는

산티아고까지 걷고 싶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걷는 이유는 다양했다.


동기가 분명한 순례자들도 있었고,

아직 명확하지 않은 순례자들도 있었다.


혹시 동기가 있더라도 처음 만나자마자,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이유를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가까스로 저녁식사 시간에 도착해서

친해질 틈도 없었기에


서먹서먹한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낯선 언어로

내 진심을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 않은

순례자들을 뒤로하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니

이미 피곤해 잠든 순례자도 있었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어두운 방에서

샤워용품을 챙겨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하러 아래속옷만 입고 들어온

할아버지가 보여 당황했다.


‘내가 잘못 들어왔나?’ 하고

샤워실을 나가 문을 다시 확인했더니,

옆에 있는 순례자가 말했다.


“화장실, 샤워실 모두 남녀 공용이에요.

방도 마찬가지고요.”


그랬다. 남녀공용이었다.


익숙한 일은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순례길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온몸으로 느껴지는 하루였다.


나는 쭈뼛쭈뼛 다시 샤워실에 들어가,

숙소에서 제공한 코인을 투입구에 넣었다.


따뜻한 물에 몸이 닿자,

피로가 물과 함께 씻겨나가는 듯했다.


쏟아지는 온수에 눈을 감고 내 몸을 맡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물이 나오다가 뚝 끊겼다.


‘뭐지? 물이 왜 안 나오는 거야?’


코인은 샤워의 시간을 정해주었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급하게 마쳐진 샤워를 끝내고,

침낭 속에 들어가 누웠다.


저녁 식사에 포도주 한 잔 마시고,

따뜻한 물로 샤워까지 하고 나니

몸은 녹아서 흘러내리는 치즈 같았다.


길고 고된 하루였다.


이제야 내가 순례자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했다.


하지만 오늘 낮에 보았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풍경과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말, 양, 소들이 이동할 때,


그것들 목에서,


청아하게 울리던 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비록 방 안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할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바로 내 옆에서 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늘 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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