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흉터가 아니라 별자리를 만든다(순례길)

이라체의 붉은 빛을 맛보다

by 시안블루



지친 발자국 위에
붉은빛이 흘러내린다

그 빛은
어둠을 태우는 생명의 불꽃,

멈추지 않고
끝까지 걷게 하리라




에스떼야를 지나면,

아예기에 이라체 수도원이 있다.


지친 발걸음을 위로하고

새로운 힘을 주는 쉼터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길 위에서,

다시 걸어갈 용기를 얻는다.


이 수도원에는 순례자들에게

포도주와 물을 제공하고 있다.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왼쪽은 와인 오른쪽은 물이었다.


이는 순례자에게

환대와 축복을 의미하며,


“산티아고 길의 환영식”처럼

여겨진다.


순례자들은

빈 물통이나 가리비 껍데기에

조금 담아 한 모금 맛볼 뿐이지만,


가끔 빈 물통에 가득 채워

취중 길을 걷는,

한국 순례자도 있었다고 한다.


포도주는 수도꼭지 물처럼

계속 나오지 않고

매일 일정량을 담기 때문에,


늦게 도착한 순례자들은

한 모금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 일행은 한 모금 맛보고,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길을 걸었다.









새벽빛이 완전히 열리기 전,

길은

푸른 안개처럼 고요하게 깔려 있었다.


들판 위에는,

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어제의 피로를 씻어내는

상쾌함이 있었다.


흙길 위를 걸을 때마다,

어둠은 조금씩 옅어지며

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길은 계속해서 앞으로 늘어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은 거칠어졌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걸까?'


걸음은 느려지고 힘이 빠지는 그때,

멀리서 오래된 종탑이 하나 보였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마을에

가까워졌구나' 생각하니,

힘이 절로 났다.


햇살에 바래고 비바람에 씻겨

어딘가 거뭇한 얼룩이 진 돌 표면은,


지난 수백 년간 이 길을 걸었던

수많은 순례자들의 땀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세월은 권력도, 영광도,

피로 지켜낸 자리마저도

바람과 햇살 속에서 흔적으로만 남는다.


그러나, 그 남겨진 모습은

지친 순례자의 걸음을 이끌어 주는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림 같은 성에 잿빛 구름이 몰려왔다.

그 먹구름마저 신비로웠다.


회색 하늘이 낮게 깔려 있어,

구름은 하늘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로스 아르코스로 향하는 흙길은

단단히 다져져 있었고,

두 발자국마다 먼지가 가볍게 일었다.


하늘은 언제나 빠르게 변했다.


햇살이 비추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길을 덮었다.


밝음과 어둠이 늘 교차하는 동안,

나는 묵묵히 흙길을 걸었다.


걷는 중에, 푸드트럭이 보였다.


걷는 동안 불쑥 나타난 푸드트럭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곳에서의 짧은 머뭇거림만으로도
온몸에 쌓인 피곤이 스르르 풀려 내렸다.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

길은 가도 가도 계속 이어졌다.


하늘은 당장 비를 뿌릴 것 같이

위협적이었지만,


길은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바람은 고요했고,

구름은 하늘을 무겁게 드리웠다.






그 길 멀리서,


흙 위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를 본 순간,

마음이 평온해졌다.


순례길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비가 거세게 쏟아져도,


나무는 흔들릴 뿐

꺾이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모습이 우리의 삶 같았다.


늘 흔들리고 흔들리고, 또 흔들려도

뿌리째 뽑히지는 않는 삶의 모습.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흙 위에 서서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을 견디며,

그저 조금씩 자라는 것,


바로 그것이 인생이었다.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안에는 늘 다시 살아날

생명을 품고 있었다.


나는 흙냄새를 깊게 들이마시고는,

다시 나의 길을 향해 걸었다.



모든 빛나는 생명은
흙의 깊은 어둠을 지나야 태어난다.

흙은 끝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품고
다시 살아나게 한다.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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