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흉터가 아니라 별자리를 만든다(순례길)

아름다운 인생

by 시안블루



스치듯 올라온 한 줄기 빛이
깊은 물결의 결을 바꾸고,

잠잠하던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온기가 태어날 때,

그 미세한 떨림 하나가
하루 전체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카스트로헤리스를 떠난 새벽,


빛은 아직 땅 가까이에 머물며
들판을 얇게 적시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 걸어가면
마치 하루가 아닌,


삶의 한 장을 넘기는 기분이었다.


카스트로헤리스를 나와,

산능곡의 원을 따라 끝없이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영혼의 사다리'가 있는 정상에 다다랐다.


나는 언덕 위에 앉아
끝도 없이 펼쳐진 흙빛 들판을 바라보았다.


카스트로헤리스 마을과 그 위의 성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헐렁이는 바람에, 흙내가 코끝을 스쳤다.


들판은 마치 오래된 상처 위에 얹어진,
부드러운 손바닥처럼 평온했다.


낮은 돌담에 앉아 흙빛 들판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목표지를 향해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걷고 싶지 않았다.


‘영혼의 사다리’라 불리는 오르막은
내 숨을 앗아가며 나를 시험했지만,


그 높이 위에서 펼쳐진 메세타는
온 세상이 바람에 맡겨진 듯,

고요하게 누워 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오래 묻어둔 마음의 결을
조용히 쓰다듬게 되었다.


그 고요한 황금빛 앞에서

내 안의 소음이 서서히 꺼져갔다.


걷다가 멈춰 앉아 바라본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평온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것임을.


내리막의 자갈이 불안하게 구를 때마다
무릎은 흔들리고 발목은 떨렸지만,

그 떨림조차도,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불편한 다리로 멈추지 않고

계속 걷는 외국인 순례자를,

길을 걷는 도중에 자주 만났다.


노란 길로 표시되어 있는 어플을 보며,

길을 이탈하고 있는지 종종 확인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화살표를 믿어.”


“화살표나 가리비 표시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져.”


내가 말했다.


“믿고 걷다 보면 길이 보여.”


그랬다.


나는 전에,

한 마을의 표지석의 파란 화살표를 보고,

따라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경험이 있었다.


화살표는 노란색이어야 했는데,

그곳에 한 표지석이 파란 화살표였다.


나는 그 경험 이후,

순례길을 안내해 주는 표지석도 못 믿고 있었다.


걷는다는 것은,
몸을 던져 마음을 깨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때 다시 알았다.


멀리서 운하의 물빛이 번져 오르고,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프로미스타는 이미 가까워져 있었다.


끝없이 흐르는 메세타 황금 들판을 걷다가,


문득 나타난 운하의 푸른 물빛과 물소리는

마치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문처럼 보였다.


바람만 스치는 적막 속에서,


물길이 흘러가는 소리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감각을

조용히 깨웠다.


건조해진 마음결에
차갑고 맑은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물 위로 반짝이던 햇빛은
지친 영혼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처럼
말없이 흘러가며 이렇게 알려주었다.


"고단한 길 위에서도,
당신을 깨우는 소리는

언제나 어디엔가 흐르고 있다.”


한 모금의 바람이
마치 새로운 계절을 건네듯,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


9월 중순의 메세타 구간은
어떤 장관보다 깊은 울림을 남겼다.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사람을 속 깊은 곳까지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힘이 있었다.


오늘의 걸음이야말로,
나를 가장 먼 곳까지 데려다준 하루였다는 것을.


마침내, 예약한 알베르에 도착했다.


주방에서 한 캐나다 노부부는

함께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내가 테이블에 앉아 가벼운 식사를 하면서

독일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을 때,


노부부는 준비한 식사를 가지고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어디에서 왔어?”

“한국이요.”

“우리 부부, 한국에 여행 간 적 있는데, 이름이...”


캐나다 노부부가 한국을 여행했다고 하니 반가워,

생각나는 지역이름을 나열했다.


할아버지는 오른 손바닥에 지도를 그리며

아래쪽을 가리켰다.


“전주, 경주요?


내가 남쪽 지역이름을 여러 개 나열했을 때,

전주와 경주를 여행했다고 하셨다.


비빔밥이 맛있었고 건축이 아름다웠다고.


캐나다 노부부는 함께 세계일주를 하면서

노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행복해하는 미소에는,


지친 하루를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따뜻함이 있었다.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인생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 많은 것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 무르익어,

서로의 하루를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상태.

앞날보다

오늘 하루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때,

인생은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게 아닐까.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선집] 별들에게 청춘을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