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흉터가 아니라 별자리를 만든다(순례길)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순례길의 또 다른 행복이다

by 시안블루




땅에 박힌 고통을 끌어안은 채,
끝내 위로만 자라는 것

몸은 낮은 곳에 남기고
시야는 하늘에 오래 머문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자리에서
견딤은 끝내 길이 된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수녀님들의 따뜻한 환대로


걸음을 멈추고 싶었던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길을 나섰다.


위로는,

말이 아니라 체온처럼 남아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마음을 안고

평원으로 들어서자,

하늘은 낮게 내려와

하루의 속도를 늦추었다.


나무 한 그루가 인상적이었다.


땅에 깊이 박힌 고통을 끌어안은 채
끝내 위로 자라나는 모습은,


고통을 견디며

끝없이 걷는 순례자 같았다.


육체와 마음의 피로를 땅에 맡기고,
의지와 시선만은 하늘을 향해 세우는 일.


그늘도 방향도 주지 않는 자리에서,

그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길이 견딜 만하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일이
곧 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이 길에서는,

붙잡을수록 무거워진다는 걸
마음이 먼저 알아챘다.

카리온에서 레디고스로 이어지는 이 길은
침묵의 길, 그 자체였다.





구름은 낮게 흘러
땅의 고단함을 덮고,
파란 틈새로 드러난 빛이
잠시 숨을 고르게 했다.


위로 올려다본 하늘이

걷는 이유를 대신해 주었다.


레디고스로 향하는 길은

내게 침묵을 건넸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한가운데,
바람에 씻긴 돌기둥 하나가
노란 화살표로만 말을 건다.


'여기, 아직 길은 남아 있다고.'


그늘도 마을도 없는 이 구간에서

종종 마음의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방향을 잃는 순간마다
화살표는 더 또렷해진다.


'더 멀리'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라고.


깔사디야 데 라 꾸에사 마을에 도착했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를 떠난 뒤 한참 동안

그늘도, 사람도, 마을도 없는

메세타의 길을 걷다 보면,


이 화살표는 방향을 알려 주는 표식이 아니라
“조금만 더 가면 돼”라는
무언의 위로처럼 다가온다.







레디고스의 한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20대 여성 두 명을 만났다.


메세타 구간을 걷는 동안

좀처럼 순례자들을 마주치기 어려워서,
그 존재만으로도 반가움이 먼저 다가왔다.


두 사람은 중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한 명은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새로운 직업의 방향을 찾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학생 시절에 만난 친구들이라 그런지
서로 나누는 말투와 웃음은

순수한 느낌, 그 자체였다.


내일 묵을 알베르게를 예약하기 위해
휴대폰을 번갈아 들고,
통역 앱에 의지해 더듬더듬 스페인어를 건네며
서로를 바라보고는 깔깔 웃었다.


그 웃음은
길 위에서 굳어 있던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이곳에서,

저녁으로 따뜻한 정찬을 앞에 두고서야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안도하는 걸 느꼈다.


그들과 함께 나눈 식탁에서,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숨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순례길에서 또 다른 기쁨이었다.



길이 고단해질수록
땅은
더 무겁게 발을 붙들고,

마음은 먼저 주저앉는다.

사람은,
그렇게 사람에게서
'다시 걸을 힘'을 얻는다.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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